이재명 대통령이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나라재정 절약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도로·철도 같은) SOC 예산에는 정치적 요소가 꽤 있잖아요.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돈을 확보하는 것이 최대 과제니까 등쌀이 보통 아니죠. 저 믿고 좀 버텨 보세요."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3일 예산 담당자와 민간 전문가를 모아 연 ‘나라재정 절약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필요한 SOC 예산 구조조정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기획재정부는 ‘총사업비 500억원’이던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대상 기준을 1000억원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예타는 사업성 떨어지는 국책 사업을 걸러내는 장치다. 지금까지 국가 세금 500억원 넘게 쓰려고 할 때 예타라는 허들을 넘어야 했다면, 앞으로는 999억원짜리 사업도 예타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여태껏 유력 정치인들이 지역구 사업을 무리하게 밀어붙일 때 중앙 정부 공무원들은 “의원님, 그 사업은 예타를 통과하지 못해 어렵습니다”라고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이런 예타를 완화하겠다는 건 세금 아껴야 하는 공무원이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겠다는 ‘항복 선언’이다.

대통령은 정치인 등쌀을 잘 버텨 보라고 했는데, 왜 이런 발표를 했을까. 1999년 만들어진 500억원 기준이 낡았기 때문이라고 정부는 강조한다. 경제 규모가 커졌으니 26년 된 기준을 올려도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그게 맞다면 왜 양도세 기본공제 기준 250만원은 29년째, 소득세 기본공제 150만원은 16년째 그대로 둬 저절로 세금을 더 내게 하는가. 상속세 과표구간과 구간별 세율은 왜 25년째 그대로인가. 세금 걷는 기준엔 엄격하면서, 세금 쓰는 기준은 왜 관대하려 하는가.

정부는 또 2020년부터 올해까지 예타가 끝난 SOC 사업 중 사업비가 500억원 이상 1000억원 미만인 사업은 4건이었다고 설명한다. 1000억원으로 기준을 올려도 우려만큼 사업이 많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식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동안 예타를 피하기 위한 ’490억원짜리 사업’이 넘쳐 났다. 서산 군비행장 민항시설 설치(484억원), 동해 석유·가스 시추(497억원), 경기 교외선 능곡~의정부 재개통(497억원) 사업이 그랬다. 1단계·2단계 식으로 사업을 분할 추진하는 ‘쪼개기’나, 설계용역 정도로 사업을 미약하게 시작해 점점 규모를 창대하게 키워 나가는 ‘알박기’ 수법이 만연했다. 예타 기준이 1000억원이 되면 쪼개기·알박기가 더 쉬워질 거란 걱정이 많다.

예타 기준을 완화하려면 국가재정법을 고쳐야 한다. 나라 재정보다는 자신의 재선이 더 큰 목표인 여야 의원들은 찬성할 것이다. 이 대통령은 ‘나라재정 절약 간담회’에서 “국가 살림을 하다 보니까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쓸 돈은 없고, 참 고민이 많다”고도 했다. 쓸 돈이 없으면, 있는 돈부터 더 잘 써야 한다. 예타 완화 방침부터 재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