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과 관련해 특검의 수사를 받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두 번째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지난달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으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29일과 이달 1일 각각 국민 100명이 윤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장관,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여러 변호사가 원고를 모집하고 있어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이는 지난달 2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 2단독 이성복 부장판사가 시민 104명이 윤 전 대통령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0만원씩 지급하라”는 승소 판결을 하면서 시작됐다.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이 충격을 주고, 국격을 추락시킨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공무원의 위법행위로 인한 위자료를 받으려면 위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를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한 경우, 잘못된 등기로 소유권을 상실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대통령이 헌법을 수호하고 법령을 지켜야 할 의무는 국민 전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일 뿐, 국민 개개인에게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라는 게 확립된 대법원 판례다. 이런 이유로 과거 ‘국정 농단 사건’으로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시민들이 위자료를 청구한 소송은 기각됐다. 당시 법원은 “박 전 대통령이 의무를 위반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국민 개개인의 신체, 자유, 명예가 구체적으로 침해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일반 국민의 정신적 고통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법원이 위자료를 인정한 근거는 오로지 ‘경험칙’이다. “비상계엄 선포 및 저지를 지켜본 시민들이 공포와 불안, 불편, 자존감 저하, 수치심 등의 정신적 고통과 손해를 입은 것은 경험칙상 명백하다”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얻은 일반적인 법칙을 뜻하는 ‘경험칙’은 엄밀한 논증을 피하려 할 때 많이 쓰인다.

한 현직 판사는 “범죄 피해자뿐 아니라 범죄 보도를 보고 불쾌감을 느낀 사람도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라고 했다. ‘계엄 당일 일찍 잠들어 몰랐던 사람은 위자료를 깎아야 하나’ ‘민생 회복 지원금에 버금가는 민생 회복 판결’이라는 말도 나온다. 실제 온라인에 ‘손해배상 소송 10만원 윤석열 보상금 참여 신청 방법’ ‘손해배상 보상금 참여 신청’ 등의 글이 셀 수 없이 많다.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식이다.

정치 행위에 대한 위자료 주장을 확대하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런 식이면 공직자들에 대한 줄탄핵, 일방적 예산 삭감에 대해 민주당에 위자료를 물어내라고 할 수도 있다. 과거 판결을 깨려면 타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모든 것을 ‘경험칙’ 한마디로 돌파한 이번 판결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자 전국법관대표회의 의장 출신의 정년 퇴임 전 마지막 판결이라는 사실은 법원에 짙게 드리운 ‘코드 판결’의 그늘을 실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