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에이지(橋本英二) 일본제철 회장이 일본 언론에 본격 등장한 건 2022년이다. 평사원으로 입사한 지 40년 만에 사장에 올라, 역대 최대 손실의 일본제철을 2년 만에 역대 최대 이익으로 반전시켰다. “계획은 일류, 실행은 삼류, 변명은 초일류”라고 비판하며 내부 개혁에 나선 결과다.
그런 그가 2023년 12월 “US스틸을 20조원에 사겠다”고 발표했을 때,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중국산에 밀리고 미국 관세에 막힌 한국 철강업의 돌파구는 미국 현지 생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이 먼저 치고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 정치권과 노조 반대에 부딪히고, 지난 1월 바이든이 ‘인수 불허’ 결정을 내려 포기가 불가피해 보였다. 그런데도 미 정부에 소송을 걸고, ‘재심사’를 요청했을 땐 무모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5개월 후, 극적으로 트럼프로부터 인수 허가를 받아냈다. 하시모토는 어떻게 ‘극(克) 트럼프’에 성공했을까.
먼저 트럼프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사람들은 트럼프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짜’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그를 ‘유연한 협상가’로 인식했다. 특히 트럼프는 바이든의 결정을 뒤집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승산이 있다고 봤다. 하시모토는 “세상일에 우연은 없다. 트럼프를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했다.
둘째, 트럼프가 원하는 것의 본질을 꿰뚫었다. US스틸은 미국 것이어야 한다는 트럼프, US스틸을 100% 완전 자회사로만 인수하겠다는 일본제철. 이 둘은 절대 타협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하시모토는 양측 입장에서 최소한의 교집합을 찾아낸다. US스틸의 최후 통제권은 미국이 갖고, 실무 경영권은 일본제철이 갖는 것. 바로 미국 정부가 핵심 사항에만 거부권을 갖는 ‘황금주 1주’였다. 또 ‘US스틸’이란 사명을 바꾸지 않고, CEO도 미국인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트럼프의 과거 발언과 책, 트럼프 측근을 최대한 접촉해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연구한 결과다.
셋째, 트럼프의 체면을 살려줬다. 하시모토는 ‘숫자와 논리’로 내린 결론을 절대 굽히지 않는 ‘철의 협상가’로 불린다. 이번에도 “일본제철의 자본과 기술이 아니면 US스틸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트럼프를 최대한 배려했다. ‘인수’ 대신 ‘파트너십’, ‘완전 자회사’ 대신 ‘미국의 통제’라는 말을 썼다. ‘미국 내 110억달러 투자’도 새로 제시했다.
무엇보다 1년 반 동안 포기를 몰랐던 하시모토의 불퇴전(不退轉)의 신념은 이 협상의 핵심 비결일 것이다. 하시모토는 “한때 세계 최고였던 일본제철을 다시 최고로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US스틸이 꼭 필요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리스크”라고 했다. 미국과 관세 담판을 앞둔 우리 당국자들도 그의 협상술에서 좋은 힌트를 얻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