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심장 스텐트 분야의 세계적 대가인 박승정 서울아산병원 교수를 인터뷰했을 때 “의사는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좀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인상적이었다. “의사는 도우미라고 생각해요.”
그와 그의 팀은 지난 30년간 스텐트 시술로 4만~5만 명 환자의 심혈관을 뚫었다. 생사 갈림길을 숱하게 겪은 그는 본인이 ‘살릴 수 있는 환자’와 ‘살릴 수 없는 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구분이 확고해 보였다. 의사는 생사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 수 있는 환자가 살도록 돕는 사람이라는 그의 직업적 ‘한계 의식’에서 깊은 겸허함이 느껴졌다.
역대 가장 격하고 긴 ‘의료 파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의사가 아닌 사람들을 만날 때면 이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다. 가장 빈번한 반응은 “의사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분노였다. 작년 2월 전공의 이탈로 각 대학병원이 수술을 절반으로 줄여 사람들의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 의사들이 본색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당시 한 전직 의협 회장은 공개적으로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고 했고, 또 다른 전직 의협 회장은 경찰에 출두하면서 백바지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오른손엔 아메리카노를 들고 언론 카메라 앞에 섰다. 국민은 의사를 이길 수 없다는 듯한 언행이 이어졌다. 전공의 대표는 환자를 지킨 선배들을 ‘중간 착취자’로 비난하고, 의사 커뮤니티엔 수술이 밀려 불안해하는 환자들을 비하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물론 의사에게 이런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작년 초 부산대병원의 한 내과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하자고 한 적이 있다. 그는 대뜸 “한가한 소리 말라”며 고함을 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러니 의사들이 욕을 먹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교수는 전공의 이탈 후 병원에서 숙식하며 24시간 중환자들을 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참의사’와 ‘파업 의사’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한편으론 오만해도 다른 한편으론 기를 쓰고 환자를 살리려는, 두 얼굴을 다 가지고 있는 의사가 현실에 더 가깝다고 본다. 중환자 수술비가 해외 주요국의 10분의 1 정도인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의료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거의 순전히 의사들의 헌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사의 노력과 희생은 상식선을 벗어난 그들의 교만함에 묻혔다. 의사는 모든 말과 행동을 다 할 수 있다는 일부의 특권 의식은 의사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의사 디스카운트’를 초래했다. 요즘 의사 단체들은 연일 새 정부에 대화하자고 손짓하고 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현 여권과 여론의 시선은 싸늘하다. ‘백바지’와 ‘선글라스’가 다시 등장하지는 않겠지만, 의사들 스스로도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