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공놀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축구는 때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난 6일 카타르월드컵 본선행 티켓이 걸린 유럽 플레이오프 결승전. 전 세계 많은 이가 러시아 침공으로 갈기갈기 찢긴 우크라이나를 응원했다. 비통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월드컵 진출이 조그만 위안이라도 되길 바랐다. 하지만 1958년 딱 한 번 월드컵에 나가본 웨일스도 양보할 수 없는 한판이었다.

웨일스 대 우크라이나 전/로이터 연합뉴스

웨일스의 1대0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우크라이나 선수들은 회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그래도 웨일스 경기장에 초청된 100여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의연했다. 한 난민은 CNN과 인터뷰에서 “잘 싸웠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승리는 푸틴의 군대를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쉽게도 카타르에서 우크라이나의 아름다운 투혼은 볼 수 없게 됐지만, 웨일스가 올라가면서 흥미로운 대진이 완성됐다. 국제부 기자 입장에선 전력보다 정세를 분석하고 싶게 하는 조 편성이다.

카타르월드컵 B조엔 잉글랜드, 미국, 웨일스, 이란이 있다. 오랜 시간 ‘핵’으로 아웅다웅한 미국과 이란이 만났다.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파기한 핵 합의를 복원하자며 최근 양국이 머리를 맞대곤 있지만, 이란은 선(先) 제재 해제, 미국은 선 우라늄 농축 중단을 주장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란은 밀집 수비를 앞세운 끈끈한 ‘늪 축구’로 경쟁력을 발휘하는 팀이다. 핵개발 시도로 인한 각종 제재에도 어떻게든 버티는 국제사회에서의 모습과 닮았다. 스포츠와 정치는 별개라지만 이란 팬들은 “미국전에서 다치면 ‘국가 유공자’로 대우해줘야 한다”며 전의를 다진다.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또 어떤가. 영국은 올림픽 등 종합 대회엔 단일 국가로 나서지만 축구·럭비·크리켓·골프 등의 종목에 한해선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로 각자 출전한다. 브리튼 섬의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이 잉글랜드인의 기원인 앵글로색슨족에게 쫓겨나 척박한 남서부 좁은 땅에 터를 잡고 세운 나라가 웨일스다. 역사도 슬픈데 인구와 경제 규모 등 잉글랜드와 비교해 뭐 하나 나은 게 없다. 그런 변방의 웨일스인들은 스포츠로 자존심을 세운다. 럭비를 잘하는 웨일스는 역대 럭비 월드컵 무대에서 잉글랜드에 2승1패로 앞서고 있다. 축구는 많이 밀리는 편이었지만, 월드컵 첫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웨일스인들에겐 평생 영국 어디에 가든 자랑할 안줏거리가 생긴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로선 미국도 신경 쓰인다. 축구를 풋볼이 아닌 사커로 부르는 ‘근본 없는’ 미국에 지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원래라면 이미 막을 올렸을 월드컵이 열사의 땅에서 열리는 탓에 늦가을인 11월로 밀렸다. 4년마다 돌아오는 지구촌 여름 축제를 즐길 수 없게 됐지만, 설레며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