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복싱에서 헤비급은 ‘꽃’이라 불린다. 거구의 복서들이 합(合)을 겨루다 ‘번쩍’ 하는 순간 승부가 갈린다. 2020년 미국 CBS가 역대 가장 위대한 헤비급 복서 10명을 뽑은 적이 있다. 1위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전설의 복서 무함마드 알리. 2위는 래리 홈즈, 3위가 조지 포먼이었다. 전성기가 짧았던 마이크 타이슨은 7위에 올랐다.
미국 선수들이 장악한 이 랭킹에 이름을 올린 두 명의 우크라이나 복서가 있다. 각각 8·10위를 차지한 블라디미르 클리치코와 비탈리 클리치코 형제다. 형 비탈리는 2004년 WBC 헤비급 타이틀을 따낸 뒤 10년간 챔피언 벨트를 지켰고, 동생 블라디미르는 WBA와 IBF, WBO 타이틀을 석권하며 헤비급을 지배했다.
그런 두 형제가 링에서 만났다면 여러 의미로 세기의 명승부가 될 뻔했지만, 둘은 그러지 않았다. 형제는 “10억 달러를 준다고 해도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순 없다”고 했다.
프로복싱의 본고장인 미국 팬들은 유럽 출신의 두 형제가 헤비급 패권을 양분한 10여 년을 ‘암흑기’라 부른다. 2m의 우월한 체격을 앞세워 안정적인 잽과 묵직한 원투 펀치로 상대를 제압하는 아웃복싱 스타일이 타이슨처럼 화끈하고 저돌적인 인파이터에 열광하는 미국 팬들의 성향엔 맞지 않았다. 2000년대 들며 복싱 인기가 뚝 떨어진 국내에서도 클리치코 형제는 낯선 존재다.
하지만 최근 그들의 이름을 국제 뉴스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링을 떠나 정치에 뛰어든 형 비탈리는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장(市長)으로 재직 중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50일이 지난 가운데 그는 웬만한 펀치에도 흔들림이 없던 링 위 모습처럼 꿋꿋이 키이우를 지켜내며 ‘결사 항전’의 아이콘이 됐다. 은퇴 후 미국과 독일에서 주로 활동했던 동생 블라디미르도 전쟁이 터지자마자 예비군에 입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궁지에 몰린 키이우에서 클리치코 시장이 보여준 변함없고 든든한 모습에 시민들은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길어야 1주일이면 키이우를 함락할 것이라 예상했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거센 저항에 결국 퇴각해 동부 돈바스 지역 장악으로 목표를 수정한 상황이다.
WP와 인터뷰에 나선 키이우의 한 자원봉사자는 “우리 대통령(코미디언 출신의 젤렌스키)도 정치인이 아니었고, 우리 시장도 정치인 출신이 아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강한 이유”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나 한국이나 정치인은 국민에게 그리 달가운 존재는 아닌 것 같지만, 목숨 걸고 최전선을 지키는 클리치코 형제는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 현역 시절 남다른 맷집을 자랑했던 형제가 잘 버텨내 다시 평화가 찾아온 조국에서 국민과 함께 웃는 날이 어서 오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