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중국을 방문한 키어 스타머(왼쪽) 영국 총리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전 악수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세계 질서의 파괴자, 도널드 트럼프.” ‘2026 뮌헨 안보 보고서’는 유럽이 미국에 보내는 ‘이별 통고장’으로 읽혔다. 인상적인 대목은 지난해 말 미 국가안보전략(NSS)의 유럽 비난을 되치기하는 문장이다. 당시 미국은 유럽을 향해 “문명 소멸” “20년 내 알아볼 수 없게 될 것” 같은 표현을 썼다. 보고서는 이를 그대로 돌려준다. “대다수 유럽인에게 미국이야말로 이미 알아볼 수 없는 나라다.”

불과 1년 전, JD 밴스 미 부통령이 유럽의 이민 정책과 극단 사상 규제를 비판하며 ‘내정 간섭’급 비난을 퍼붓거나, 트럼프가 백악관 집무실에 각국 정상들을 소집해 러·우 전쟁 종전을 두고 훈계할 때만 해도 유럽의 마음은 “그래도 달래서 같이 가자”는 쪽이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동맹국 영토인 그린란드를 무력으로 장악하겠다며 위협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함께 피 흘린 나토군을 모욕하자 유럽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트럼프를 단 1초도 믿지 말라. 몇 달 동안 굽신거리면서 타협하려 해도 효과가 없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다. 마크롱은 그린란드 사태 당시 트럼프를 ‘내 친구’라고까지 부르며 설득 메시지를 보냈지만, 트럼프는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며 동맹국 정상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처음엔 충격 요법 또는 경종으로 좋게 받아들이려던 트럼프의 표현이 점차 모욕과 조롱으로 흐르자 유럽 역시 정색하고 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이 최근 “유럽은 미국 없이 스스로 방어할 수 없다. 꿈 깨라”고 한 뒤 유럽에선 자강론이 들끓는다.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는 ‘유럽 합중국’을, 호세 마누엘 알바레스 스페인 외무장관은 ‘유럽군 창설’을 제안했다. 트럼프가 비난하는 민주·공존·다원 같은 ‘유럽 보편 가치’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차라리 미국과 갈라서서 힘을 갖겠다는 선언이다.

최근 방중한 영국 총리가 유니언잭·오성홍기를 배경으로 시진핑과 악수하는 장면은 시사적이었다. 유럽 10여 국은 식민 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다. 최근 각국은 중국을 비롯, 인도·남미와 잇따라 손잡고 있다. 세계 질서를 미국 마음대로 휘젓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층 외교 역량은 제국주의 시절부터 축적했을 것이다. 인구 4억5000만명의 유럽연합(EU)은 여전히 세계 3대 경제권이고, 프랑스·영국은 핵보유국이다.

2차 세계 대전 때 미군 40만명 이상이 전사했다. 그런 미국을 유럽이 ‘손절’하는 세상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대서양 동맹 붕괴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트럼프와 MAGA 세력의 눈엔 한미동맹 역시 ‘위대한 미국’의 발목을 잡는 족쇄이기 때문이다. 북·중·러의 핵위협에 어떻게 자주적으로 대처할지, 동북아에서 자유·민주 이념을 공유하는 일본·대만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할지 상상력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