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패권 경쟁,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국제 정치’가 한때 '평평했던' 세상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왼쪽부터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92년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인류 최종의 정치 체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시장, 개방경제가 결국 세계를 한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 10여 년 뒤인 2005년, 미국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과 칼럼에서 후쿠야마의 낙관이 현실화하고 있음을 방증했다. 기술 혁신과 활발해진 글로벌 분업으로 국경은 허물어지고, 경쟁의 장은 평탄해졌다며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같은 경기장에서 달리는 시대를 맞이했다고 했다. ‘평평한 세계’라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닌, 새로운 세계 질서의 요약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프리드먼이 본 세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패권 경쟁,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국제 정치’에 허물어졌다. 당시 프리드먼이 제시한 ‘10대 평탄화 요인’ 중 지금도 유효한 것은 별로 없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나토와 중·러의 새로운 장벽으로 대체됐다. 정보 평등의 상징이었던 인터넷은 거짓과 혐오를 퍼뜨리는 도구로도 악용되는 모습이다. 아웃소싱·오프쇼어링은 리쇼어링(reshoring)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으로 대체됐고, 디지털 혁명을 이끈 오픈 소스의 이념도 기술의 주권화·무기화 흐름 속에서 “모든 기술은 전략물자”라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한때 평평하던 세상은 이제 크고 높은 산맥과 낭떠러지로 울퉁불퉁해지고 있다. 많은 유럽 정치인이 이 ‘지각 변동’을 바라보면서 “100여 년 전 겪은 세계사적 패턴이 반복되는 게 아니냐”고 불안해한다. 대여섯 가지 유사점이 지적된다. 글로벌화가 절정을 찍고 붕괴하고, 신흥 패권국이 부상해 구(舊) 질서에 도전한다. 기존 동맹은 구조적 불안에 약화하고, 지정학적 충돌이 세계 곳곳에서 고조된다. 보호주의 무역이 확산하고, 기술과 안보가 결합하며, 진보와 자유주의에 대한 믿음도 흔들린다. 20세기 초 그 결과는 경제 공황과 세계 대전이었다.

경제사학자 애덤 투즈도 “오늘 우리의 상황은 20세기 초 유럽과 너무나 닮았다”고 경고한다. 후쿠야마가 조망한 인류 역사는 해피 엔딩은커녕, 반복되는 위기의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한국에는 120여 년 전보다 더 아슬아슬한 상황일 수 있다. 아시아 변방의 최약소국에 불과하던 나라가 ‘평평한 세계’를 거치며 세계적 리더 국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잃을 게 많아졌다는 의미, 더 이상 ‘수동적 약자’가 아닌 무게 있는 행위자로서 ‘강자의 게임’에 뛰어들어야 할 위험이 커졌다는 의미다. 이 나라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