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80년대 초 사우디아라비아 내 항구 두 곳을 오가는 유조선 항해에 참여한 적 있다. 사우디의 동해안에 해당하는 페르시아만의 라스타누라에서 서해안 쪽 홍해의 얀부를 오가며 원유를 수송하는 항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매우 전략적인 수송망이었다. 혹시라도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될 경우를 대비해 사우디 정부가 페르시아만의 원유를 홍해 쪽으로 옮겨놓는 체계였다.
이런 사우디의 대비는 곧 현실이 됐다. 1980년대 후반 이란·이라크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른바 ‘유조선 전쟁(Tanker War)’이 벌어졌다. 페르시아만을 오가는 유조선들이 미사일과 기뢰 공격을 받았고 세계 해운은 극도의 긴장 속에 놓였다. 서방 유조선의 피격 사건도 이어졌다. 그럼에도 모든 선박이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중립국 국기를 단 선박이나 특정 국가와 우호 관계에 있는 선박은 비교적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었다. 바다는 언제나 정치와 전략의 공간이었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해상 봉쇄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흑해 항로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홍해에서는 후티 반군의 공격으로 상선들이 수에즈 운하 대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해상 요충지가 바로 호르무즈 해협이다. 세계 원유 해상 운송의 약 20%가 이 좁은 해협을 통과한다. 만약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다면 세계 경제는 즉각적인 충격을 받는다. 특히 대한민국은 더 취약하다.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그 수송을 거의 전적으로 해상 운송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름값이 오르는 문제가 아니다. 정유, 석유화학, 전력 생산, 해운과 물류 등 산업 전반이 영향을 받는다. 결국 국민 생활에도 충격이 미친다.
이제 우리는 해상 안보 전략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인식해야 한다. 첫째, 원유와 에너지 수입국의 다변화가 필요하다. 사우디는 지금은 페르시아만에서 홍해로 원유를 보내는 육상 파이프라인을 구축해 호르무즈를 거치는 해상 수송로 의존도를 낮췄다. 한국 역시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장기 계약 구조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둘째, 전략 비축유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국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단기간에 수입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비축유는 단순한 저장량의 문제가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실제로 얼마나 빠르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셋째, 위기 상황에서 사용할 대체 항로와 수송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오늘날 에너지 안보는 단순히 경제 정책의 영역이 아니라 해양 안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주요 해상 수송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국제 협력, 해군력의 역할, 해상 정보 체계의 구축은 모두 국가 안보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넷째, 우리 해군의 해상 교통로 보호 능력도 강화해야 한다. 세계 에너지 수송망이 불안정해질 때 자국 선박과 선원의 존재는 국가 경제의 안전판이 될 수 있다. 과거 유조선 전쟁 시기에도 한국 선원들은 위험한 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해운과 선원은 단순한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다. 우리 수출입 화물의 99%가 바다를 통해 이동한다. 바다가 막히면 경제가 멈춘다. 1980년대 페르시아만에서 경험했던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바다의 전략적 가치가 위기 순간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바다는 단순한 운송로가 아니라 국가의 생명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