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시행되는 ‘돌봄기본법’은 한국 사회가 돌봄을 국가 책임의 영역으로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제도적 전환점이다. 노인·장애인·아동을 포괄하는 돌봄을 더 이상 가족 내부의 부담이나 개별 복지 사업의 문제로 남겨두지 않고, 공적 체계로 재구성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을 단순히 ‘복지 서비스 확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는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축소 사회에 진입했다. 성장 사회에서 돌봄은 관심이 적었다. 경제는 팽창했고 노동력은 충분했다. 가족 구조도 일정한 재생산 능력을 유지했다. 성장 사회에서 정의란 성과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축소 사회에서 정의의 의미는 달라진다. 인구는 줄고 노동력은 감소하며 재정 여력은 압박을 받는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문제가 아니라, 줄어드는 자원을 어떻게 유지하고 보호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가 된다. 이때 사회가 지켜야 할 기준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삶’이다.

이 지점에서 돌봄은 복지의 한 분야가 아니라 사회 지속가능성의 핵심 인프라가 된다. 돌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노인의 고립, 장애인의 배제, 아동의 빈곤, 돌봄 노동자의 소진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연대를 약화시키는 구조적 위험으로 확산된다. 따라서 돌봄기본법의 의미는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확대라는 행정적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핵심은 시스템 변화가 아니라 ‘어떤 사회를 유지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축소사회에서 돌봄은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시민권의 조건이 된다. 돌봄을 받을 권리, 돌봄을 제공하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을 권리, 돌봄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는 모두 민주주의의 일부다. 돌봄 민주주의는 상호 의존의 현실을 외면한 채 자율적 개인만을 전제해 온 기존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인간은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 의존적 존재가 된다. 아동기, 질병, 장애, 노년은 보편적 조건이다. 민주주의가 이러한 취약성과 상호 의존을 제도에 반영하지 못한다면 형식적 절차에 머물 수밖에 없다.

축소 사회에서 돌봄의 실패는 복지의 실패를 넘어 사회 붕괴의 신호가 된다.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돌봄 부담이 가족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면 출산은 더 위축되고 노동시장 참여는 감소하며 지역 공동체는 해체된다. 이는 다시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돌봄은 비용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유지 비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돌봄기본법은 행정 서비스 개편을 넘어 국가 운영 원리의 전환을 의미한다. 성장 사회에서 정의가 분배의 문제였다면 축소 사회에서 정의는 유지의 문제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가의 문제다. 그 핵심이 바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돌봄이다.

이제 과제는 분명하다. 중앙정부는 돌봄을 지출이 아니라 사회 지속가능성을 위한 전략적 투자로 인식해야 한다. 지자체는 집행 기관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존엄을 지키는 책임 주체가 돼야 한다. 시민 또한 돌봄을 시혜나 부담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민주적 계약으로 이해해야 한다. 돌봄기본법 시행은 시작일 뿐이다. 축소사회에서 돌봄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다. 존엄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회는 성장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실패한 사회다. 이제 돌봄을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설계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