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전·충남, 광주·전남을 중심으로 광역 행정구역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행정구역 통합은 세계적 흐름이며, 언젠가 가야 할 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는 논의는 방향도, 순서도 잘못됐다.
첫째, 국가 전체 차원에서 행정구역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 마스터플랜이 없다. 둘째, 통합 이후 지방의 자치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구체적 설계가 없다. 셋째, 통합의 직접적 당사자인 지역 주민들이 논의 과정에서 배제돼 있다.
이렇다 보니 정부가 내놓는 대책은 고위직만 늘리는 조직 개편에 머물고, 내용 역시 기존 균형발전 정책의 재탕 수준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수십조 원 지원’도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2005년 이후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에 투입된 누적 예산만 이미 200조원에 육박한다. 재정 투입만으로 지방이 살아날 수 있었다면 문제는 진작 해결됐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통합을 위한 통합’이 아니라 ‘국가경영시스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중앙정부가 권한과 재원을 움켜쥐고 있는 현재 구조에서는 지방이 스스로 정책을 설계하고 재정을 책임지는 자치 역량을 갖기 불가능하다. 이 상태에서 행정구역만 키우는 것은 중앙 의존의 확대와 조직 비대화를 초래할 뿐이다.
중앙과 지방 간 권한 배분, 재정 구조, 국가 기능의 배치를 다시 짜야 한다. 중앙은 국가 전략에 집중하고, 지방은 정책과 재정에 실질적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정부는 먼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개편의 큰 그림을 제시하고, 주민이 참여하는 공론화 과정으로 통합의 방식과 범위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국가경영시스템 재설계와 국민적 합의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과제부터 우선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 해법이다. 그 대표적인 과제가 바로 ‘행정수도 세종의 완성’이다.
20년째 반쪽짜리 행정도시에 머물러 있는 세종을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완성하려면 대통령실이나 국회 등 정부기관의 이전만으론 부족하다. 행정수도에 걸맞은 기능과 경쟁력을 갖추도록 스스로 성장하고 자립하는 자족도시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최소 100만명 이상 규모로의 도약이 요구된다.
더 나아가 행정수도 완성에 그칠 것이 아니라 충청권 전체를 아우르는 ‘행정수도권’으로 확장해야 한다. 이는 수도권 과밀을 완화하고 국가 기능을 합리적으로 재배치하기 위한 균형발전 전략의 핵심 축이다. 행정수도 세종의 완성과 행정수도권 구축은 국가경영시스템 재설계를 실현하는 출발점이다.
주요 국가들은 이미 단일 도시가 아닌 행정수도권 개념으로 국가를 경영하고 있다. 미국은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메릴랜드와 버지니아를 아우르는 약 600만명 규모의 행정수도권에서 국가 중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프랑스 역시 ‘그랑파리(Grand Paris)’ 프로젝트를 통해 수도 기능을 광역적으로 재편하며 국가 경영의 효율성을 높였다. 단순한 행정구역 통합이 아니라 국가경영시스템을 전략적으로 재설계한 결과다.
우리도 행정수도 세종의 완성과 충청권 행정수도권 구축을 발판으로 전국 단위의 광역 발전 전략을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치밀한 설계 없이 선거를 앞두고 밀어붙이는 졸속 통합은 국가 자원을 낭비하고 사회적 갈등만 키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이 합의한 과제부터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는 책임 있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