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곳곳에서 차량 돌진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달 초 서울에 온 일본인 관광객 모녀가 인도로 돌진한 음주 운전 차량에 치여 어머니가 숨지고 딸은 중상을 입었다. 사고 차량은 인도를 넘어 30m를 더 달렸고, 시민들이 주변에 있었다면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지난 8월 경기도 용인에서는 식당으로 차량이 돌진해 1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5월에는 서울 강동구 길동시장 안으로 차량이 돌진해 12명이 부상했다. 지난해 서울시청 근처에서는 인도 돌진 사고로 9명이 숨지는 참사가 있었다. 방호되지 않은 공간으로 차가 돌진했다는 점에서 같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런 사고를 단순 교통사고로 인식한다. 하지만 차가 군중을 덮치면 테러든 음주든 급발진이든 결과는 같다. 개별 운전자 실수냐 테러 행위 예방이냐를 넘어 공간이 위험을 흡수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이를 제도화한 개념이 바로 ‘테러 예방 설계’다. 이름 탓에 테러 전용 대책으로 오해받지만 실제로는 음주 운전, 급발진, 운전 미숙 등 모든 차량 돌진 사고를 예방하려는 도시 안전 설계다. 원인은 달라도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대응 방식은 같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미국 뉴올리언스에서는 픽업트럭이 새해맞이 인파를 향해 돌진해 14명이 숨지고 57명이 다쳤다. 2016년 프랑스 니스와 2017년 영국 런던, 스페인 바르셀로나,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차량 돌진 테러도 차가 대량 살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사고와 테러의 경계는 이미 희미해졌다.
이러한 사건 이후 미국과 유럽 주요 도시는 테러 예방 설계 개념을 도입해, 광장·보행로의 볼라드(자동차 진입 방지용 말뚝)와 조형물 등으로 방호를 강화했다. 테러뿐 아니라 일상 속 모든 차량 돌진에 대응하려는 조치다.
우리나라는 곳곳에 볼라드가 설치됐지만 차량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현행 ‘교통 약자의 이동 편의 증진법 시행규칙’은 볼라드를 속도가 낮은 차의 충격에 견딜 수 있는 구조로만 규정한다. 또 국토교통부의 ‘도로 안전시설 설치 및 관리 지침’에 따르면 난간과 보행자용 방호 울타리 설계 기준도 ‘사람이 기대거나 밀었을 때의 정적 하중’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나라에는 속도가 낮은 차를 막는 시설은 있어도 돌진 차량에 시민이 다치지 않게 할 법적 기준은 없는 셈이다.
‘건축물의 테러 예방 설계 가이드라인’과 ‘차량 테러 예방 및 대응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권고 사항일 뿐이다. 무엇보다 구조물 강도·간격·설치의 구체적·정량적 기준이 없다. 반면 미국에서는 차량의 속도·중량, 충돌 에너지를 반영한 구체적 설계 기준을 제시해 실무자들이 활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구체적 테러 예방 설계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야 ‘속도가 낮은 차량’뿐 아니라 돌진하는 ‘무기화된 차량’을 막을 수 있다. 이 기준을 토대로 법제화하면 공공시설과 광장의 방호 수준은 한층 강화된다. 설계 기준은 지하철역 출입구, 대형 행사장·광장, 학교·병원·노약자 시설 등 불특정 다수 밀집 공간부터 적용해야 한다.
최근 테러 예방 설계는 도시의 미관과 기능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방호 성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벤치·화분·조형물·화단 등 도시 경관 요소도 충분한 강도를 갖춘다면 미관을 유지하면서 방호 시설로 활용할 수 있다. 테러 예방 설계는 선택이 아니다. 안전은 설계 단계부터 확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