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 간 RDP(상호 방위 조달 협정) MOU 체결 논의가 교착 상태에 놓였다. RDP는 단순한 조달 협정을 넘어, 양국 방위산업의 상호 운용성과 기술 표준화 제도화까지 아우르는 전략적 협력 기반이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일본과 호주, 나토 주요 회원국 등 28국과 이미 RDP를 체결해 자국 방산 시장 진입 장벽을 낮췄다. 하지만 정작 동맹국 중에서도 안보 위협이 가장 큰 한국이 미체결국이라는 점이 아쉽다.
한미 RDP가 체결되면 미국에서 정부의 공공 조달 시 미국산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매하도록 한 자국산 우선 구매법(BAA·Buy American Act) 적용의 예외를 인정받는다. 거기에 더해 무관세 혜택과 미 국방부 연구·개발 사업 참여 자격 등을 확보한다. 이는 곧 방산 수출 확대를 넘어 첨단 기술 공동 개발과 글로벌 공급망 신뢰 확보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 방위산업체들이 미 국방부 조달 시장에 진입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요소의 해소로 이어지는 방산 경쟁력의 근본적 향상이다.
2023년 미 국방부 조달 예산 4570억달러 중에서 한국 기업의 수주액은 14억달러로 전체의 0.3%에 불과했다. 이 중 99% 이상이 주한 미군 관련 계약에 집중됐다. 미 본토를 대상으로 한 수주 규모는 수백만 달러였다. 우수한 기술력과 생산 역량을 갖춘 한국의 업체들이 제도적 장벽 때문에 미국 본토 방산 시장에는 아예 접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 회계감사원에 따르면, 미국은 2019~2023년 RDP 체결국 28국에서 매년 방산 수입의 84%에 이르는 연평균 52억달러 상당을 구매했다. 즉 RDP는 해외 방산 기업의 미국 방산 시장 접근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RDP는 한국 조선업의 노하우를 살려 미국 조선업의 부활을 지원한다는 ‘마스가(MASGA)’와도 맞물려 한국 조선업의 글로벌 도약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향후 미 연방법 개정 등으로 함정 신조 및 정비 참여 기회가 열리면 RDP 체결국은 미국 방산 기업과 동등한 자격으로 경쟁 입찰에 참여할 수 있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 품질과 납기 경쟁력을 갖춘 한국 조선 업계는 RDP를 계기로 미국 해양 방산 파트너로 자리 잡을 것이다.
RDP는 한국이 미국·NATO 중심 글로벌 방산 공급망 네트워크에 편입됨도 의미한다. RDP 체결국 대다수가 NATO 회원국이다. 즉 RDP 체결은 한미 조달 협정을 넘어 EU의 유럽 방위산업 전략, 무기 공동 구매 등과 연계해 한국의 유럽 공동 개발 프로젝트 참여 가능성도 넓힌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인했듯 공급망 신뢰와 상호 운용성 확보가 방산 경쟁의 핵심임을 감안하면 RDP 체결의 전략적 의의는 더욱 크다.
아울러 RDP로 한미 간 군수 물자 및 기술 교류의 제도적 안정성을 높이고, 위기 상황에서 공급망 붕괴 위험도 방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한국 기업은 방산 기술 협력 위원회 및 공동 연구·개발 사업 참여 기회도 확보할 수 있다.
지금은 한국이 글로벌 방산 신뢰 체제에 편입될 결정적 시점이다. 한미 RDP는 조달 협정을 넘어 기술·산업·안보를 연결하는 전략적 성장 플랫폼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방산 역량 강화 정책을 본격화하면 RDP는 한미 방산 협력의 핵심 디딤돌이자, K조선·방산의 세계시장 도약을 견인할 것이다.
한미 RDP는 한미 동맹의 산업적·안보적 심화를 실현할 수단이자,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기회다. 지금이 그 문을 열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