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유엔 창설 8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달 말 열린 제80차 유엔총회에서 한국은 의장국을 맡아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위상을 다시금 보여줬다. 과거 원조 수혜를 받던 나라였던 한국이 이제는 공여하는 나라로 성장해 인류 발전의 귀중한 사례가 됐다는 사실을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공적개발원조(ODA)에 대한 지원이 줄어드는 지금, 한국이라는 국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개발원조를 통해 촉진된 인적 자본 형성과 양성평등이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경제 성장과 번영으로 이어졌다는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발전사는 다른 국가들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는 데 커다란 영감이 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을 향한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최근 국제사회에선 팬데믹, 분쟁, 기후 위기 등 복합적 위기로 인해 개발 협력의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 주요국들이 경제 회복과 안보 문제에 몰두하면서 국제 개발 재원은 빠르게 줄어드는 추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전 세계 ODA 예산은 지난해 9% 감소한 데 이어 올해는 최대 17%까지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공여국인 미국·프랑스·영국·독일 등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모두 ODA 예산을 삭감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일이다. 결국 줄어드는 지원으로 인한 피해는 가장 취약한 국가의 여성과 아동에게 집중되고 있다.
K팝을 비롯한 K콘텐츠가 세계를 휩쓴 것처럼, 이제는 ‘K-ODA’가 세계를 사로잡을 차례다. 한국은 2010년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 이후 대외 원조를 꾸준히 확대해 지난해 39억4000만달러를 기여하며 유엔인구기금(UNFPA) 공여국 중 10위에 올랐다. 2019년 UNFPA 서울사무소 개소 이후 한국은 핵심 지원을 두 배 이상 확대하기로 약속했다. 특히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분쟁 취약국 사업은 유엔인구기금과 연계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말리, 소말리아, 남수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이동식 산부인과 진료를 비롯한 성·생식 보건 지원, 젠더 폭력 대응 서비스 등을 지원하며 약 400만명의 생명을 지켜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원조를 넘어, 평화·인도주의·개발을 연결하는 모범적 사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K-ODA’는 한류 못지않게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한국의 새로운 국가 브랜드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오랜 시간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았던 만큼 이제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는 ‘환원’의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한국의 독특한 사례는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해 다시 나눔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K-ODA가 구현하는 연대와 돌봄, 연민의 가치는 유엔 창설이 지향한 평화의 토대이자, 오늘날 국제사회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산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 ‘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서로를 돕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이며,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는다. 대한민국이 K-ODA를 통해 희망과 연대의 길에서 국제사회를 선도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