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일본과 필리핀 간에 체결한 ‘상호 접근 협정(RAA·Reciprocal Access Agreement)’이 발효됐다. 호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이 맺은 협정인데 중국·북한·러시아가 손을 잡고 권위주의 삼각 연대를 본격화하고 있는 것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의 틀이다. 우리는 그런 협력의 틀에서 빠져 있다.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은 반미 연대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자유 세계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임을 만방에 드러냈다. 권위주의 삼각 연대는 한반도, 대만해협, 남중국해를 하나의 전장으로 묶어 자유민주 국가들을 압박하는 연대 체제를 완성했다. 동북아 지역은 언제든 동시다발적 충돌로 번질 수 있는 화약고가 됐다. 동맹과 우방의 신속하고 결연한 공동 대응만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운명 공동체다. 일본에는 한반도 유사시 증원·보급·후방 지원의 핵심적 거점 역할을 하는 7곳의 유엔군사령부 후방 기지가 있다. 그러나 현재 한일 간 안보 협력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에 국한돼 있다. 실제 전력 이동이나 기지 활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는 없는 실정이다. 만약 북한의 미사일 집중 공격으로 한국 내 주요 공군 기지가 무력화될 경우, 일본 기지를 활용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 군의 작전은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안정적인 군수품 조달이 필요한데, 일본은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이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상호 접근 협정(RAA)과 상호 군수 지원 협정(ACSA)을 조속히 체결해 북한의 침공에 공동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RAA는 기지·항만 사용을 제도화하는 장치이고, ACSA는 탄약·연료·식량 같은 필수 군수품을 상호 지원할 수 있게 한다. GSOMIA, RAA, ACSA 이렇게 세 가지가 결합될 때 비로소 양국의 안보 협력은 정상 궤도에 오른다.
한일 양국은 안보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공통의 인식을 갖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이 과거와 같은 군국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은 희박한데, 일본과의 안보 협력을 일본의 재무장에 동조하는 행위로 매도하는 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안보 현실을 외면하는 위험한 태도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동맹 네트워크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일본과의 제도적 협력이 없이는 한미 동맹조차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태평양에는 집단 안보 체제가 없고 미국과의 양자동맹에만 의존해왔다. 중국·러시아·북한의 권위주의 연대에 맞서려면 민주주의 국가들이 참여하는 ‘아시아판 나토(NATO)’가 필요하다. 미국의 핵심 동맹이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이 중심이 되어야 아시아판 나토 설립이 가능해질 것이다. 한일 협력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면서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지금이야말로 과거를 넘어 전략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