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챗GPT의 등장은 인류 지식사에 새로운 경계선을 그었다. 예수의 탄생으로 역사가 BC와 AD로 갈라졌듯, 이제는 2022년을 기준으로 BA(Before AI)와 AA(After AI)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인간은 더 이상 영혼·정신·육체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라는 제4 차원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변모했다.

요즘은 정치·경제·사회와 더불어 학문의 질서도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박사라는 이름만으로 전문가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실제로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의 AI 융합 박사과정에는 이미 박사 학위를 가진 현직 교수와 명예교수들이 다시 입학해 공부하고 있다. 박사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번째, 세 번째 학문적 도약이 필수다.

사실 박사 이후의 심화 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자연과학·공학·의학에서는 2~3년 연구 훈련 과정인 ‘박사 후 과정(포닥·Post Doctorate)’이 보편화돼 있다. 독일에는 박사 학위 소지자가 독립적 연구 능력과 강의 능력을 증명해야 교수 자격을 얻는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이 있다. 러시아의 닥토르 나우크(Doktor Nauk)는 박사 위의 상위 학위로, 박사 후 수년간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야 획득할 수 있다. 중국에는 박사 학위를 가졌더라도 별도 심사를 거쳐야만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박사지도사(博士生導師) 제도가 있다. 모두 박사 이후 학문을 심화하거나 독립성을 검증하는 제도다. 하지만 국가별·분야별로 흩어져 있어 오늘날의 융합적 요구와 인공지능 혁명의 파고를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인공지능은 단일 전공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학문 전체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사회과학자가 인공지능을 배우고, 의학자가 데이터 과학을 익히며, 인문학자가 알고리즘을 이해하는 시대다. 기존 지식만으로는 전문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제는 포닥, 하빌리타치온, 닥토르 나우크, 박사지도사 같은 박사 후 제도를 아우르고, AI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학문 심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필자는 이를 ‘대박사(Grand Doctor)’라고 부른다. 대박사는 단순히 박사 학위의 연장이 아니다. 기존 전공을 인공지능과 융합하고, 급변하는 지식 환경 속에서 학문적 재무장을 제도화하는 장치다. 학부–석사–박사–대박사라는 4단계 구조가 정립될 때, 지식 생태계는 비로소 미래 사회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다.

대박사는 개인의 ‘학문적 결산’이 아니라 ‘재무장’ 성격을 갖는다. 인류는 이제 평생 여러 번 학문적 도약을 요구받는다. 기존 전공 위에 새로운 기술과 사상을 접목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제도화된다면 학문은 과거의 지식 축적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향한 열린 체계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대박사는 특정 대학이나 연구자의 선택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가 준비해야 할 새로운 고등교육 정책 과제다. 한국이 먼저 이 제도를 제도화한다면 세계적 표준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대박사는 인공지능 시대 인류가 맞이할 새로운 지식 체계의 상징이 될 것이다. 이제 박사로는 부족하다. 인공지능 시대의 답은 대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