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철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부원장

올해 상반기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883만명에 달했다. 관광업계는 한 해 2000만명의 외국인이 찾아오는 시대가 곧 도래할 것으로 내다본다. 급증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할 ‘대중교통 지불 시스템’은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신용카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신용카드에 후불 교통카드 기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신용카드에 교통카드 기능을 넣은 것이지, 신용카드 자체의 기능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 주요 도시에서 교통카드 기능이 없는 신용카드 한 장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네덜란드, 호주 시드니 등은 이미 오픈 루프(Open-Loop) 결제 시스템, 즉 은행에서 발급받은 콘택리스 신용카드나 모바일 페이 앱만으로 대중교통 요금을 직접 지불하는 체계를 운영 중이다. 일본도 오사카 등에서 일부 도입하기 시작했다. 버스나 지하철 탑승 시, 별도의 교통카드를 구입하거나 충전하지 않아도 되며, 외국인도 본인이 원래 쓰던 카드로 현지 교통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이러한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후불 교통카드를 상용화하고 곧 전 국민이 이용하면서 ‘스마트 교통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체됐다. 대중교통 이용을 위해서는 여전히 별도의 교통카드나 후불 교통카드가 내장된 신용카드가 필수다. 외국인은 교통카드 발급이나 현금 환전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정체 현상이 발생한 가장 큰 이유는 사업자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 충돌과 당국의 무관심이다. 현재 교통 요금 정산은 티머니 등 정산 사업자가 카드사와 운송 기관 간 중개 역할을 하는데, 기존 수익 모델 붕괴를 우려해 새로운 시스템 도입에 소극적이다. 정부는 대다수 국민이 이미 교통카드를 사용하고 있는데 굳이 외국인을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이해관계 충돌과 무관심 속에 혁신은 미뤄지고, 불편은 고스란히 외국인을 비롯한 이용자 몫이 되고 있다.

최근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는 있다. 애플페이의 국내 도입을 계기로 카드사들이 대거 관련 인프라를 확충하면서, 기존의 폐쇄형 결제망을 벗어나 신용·체크카드 결제의 글로벌 표준을 말하는 EMV(유로페이·마스터카드·비자) 기반 결제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갖춰지고 있다. 하지만 민간 주도의 변화가 정책적 전환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부의 명확한 의지와 조정력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새로운 결제 인프라 도입을 위한 가이드라인과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미 여러 국가에서 검증된 시스템인 만큼, 기술적 장벽은 크지 않다. 최대 걸림돌은 ‘이해관계 조율’이다.

오픈 루프 시스템은 외국인에게 단순히 교통 결제를 편리하게 만드는 차원을 넘어, 국가의 관광 경쟁력과 대중교통 접근성을 높이는 핵심 수단이다. 더 이상 민간 사업자 간의 협상으로 남겨선 안 된다. 정부가 나서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외국인 관광객 2000만명 시대를 바라보면서 ‘외국인도 본인 카드 한 장으로 지하철과 버스를 탈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전 세계에 널리 쓰이는 사실상의 표준을 도입하는 것이 우리나라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도 예산도 아닌, 정부의 추진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