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관점으로 세상을 경험·인식하는 프레임이다. 시대를 초월한 불변의 진리도 있지만, 산업 진화 과정에선 이게 늘 바뀐다. 변화무쌍한 경영계에서 패러다임이 변하는 이유다. 산업 초기부터 국가가 주도해야 했던 국방·우주개발 패러다임도 변하고 있다. 불확실성이 높은 우주개발 사업의 주도권은 2000년대 들어 민간으로 넘어왔다. 우주개발이 돈 되는 사업이라 판단한 민간 자본의 참여가 늘면서 ‘뉴스페이스 시대’가 열렸다. 남 일 같지 않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방이 부활하며 방산도 뜨고 있다. 항공우주와 방산은 뿌리가 같다. 그래서 하나의 산업으로 묶인다.
대한민국 항공우주·방산 중심에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있다. 1990년대 들어 항공기 산업에 뛰어든 삼성·현대·대우 3사의 외환 위기 당시 구조 조정으로 탄생했으니 시작부터 특별하다. 항공우주산업 대표인 이 기업은 법적으로 민간 방산 업체다. 실제로는 공기업이다. 한국수출입은행(26.41%)이 대주주고 국민연금(9.29%)이 2대 주주인 지배 구조 때문이다. 공기업은 주요 인프라 부문에서 독점적 지위로 안정적 사업을 하지만 정부 입김에 좌우되어 경영 제약과 관료화 가능성도 안고 있다. 공기업 경영 평가는 그래서 정부의 감시이자 보상 체계다. 그러나 민간 법인 신분 KAI는 어느 쪽도 분명치 않다. 수출입은행의 입장에선 위험을 수반한 통 큰 결단보다는 안정적 사업 관리가 우선이다. 최근 한국형 전투기 개발 성공과 K방산 수출에 힘입은 경영 성과에 가려져 있지만 이전까지 KAI의 실적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KAI가 잠재력을 구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문제 핵심엔 비전문가의 낙하산 경영이 있다. 정부가 바뀌면 CEO는 전직 각료와 군 출신으로 교체된다. 주인 없는 기업에서 몇 년마다 바뀌는 경영자에게 장기적인 비전·전략과 책임 경영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의 영향권을 벗어난 오너 경영 또는 전문 경영인 요구가 커지는 배경이다. 그러면 둘 중에선 어느 쪽이 유리할까. 여기도 패러다임 변화가 있다. 회사의 명운을 가르는 경영자의 의사 결정은 지배 구조가 좌우한다. 주주와 경영자 간 입장이 종종 갈리지만 중요 의사 결정은 역시 대주주 영향권에 놓인다. 그러면 소유와 경영 분리는 이상적인 형태일까. 1930년대 이후 소유와 경영 분리는 경영자 혁명으로 불리며 학계·산업계의 화두였다. 1970년대 중반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 전까지는 그걸 패러다임이라고 했다. 그러나 전문 경영자가 항상 주주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가설이 속속 확인되며 환상이 깨졌다. 경영을 위임받은 대리인의 특권적 소비와 투자 회피, 성장 기회 포기와 단기 이윤 추구가 현실로 입증되어서다. 경영학 교재도 이젠 소유·경영 분리를 이상적 지배 구조로 보지 않는다.
최근 K방산이 주목받지만, 미국과 유럽 주도의 항공우주·방산 시장 구조는 분야마다 수십 년 역량을 축적한 메이저들의 지위가 견고하다. 작년 말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발표한 ‘세계 100대 방산 기업’에는 록히드마틴을 비롯해 RTX·노스럽그러먼·보잉·제너럴다이내믹스까지 미국 기업들이 5위권을 독점했다. 국내 기업으로는 한화·KAI·LIG넥스원에 이어 현대로템이 새로 진입했다. ‘국대’로 출발한 KAI의 지위는 국제 무대에서 초라하다. 최근 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방산 수요 확대로 경쟁사들이 엄청난 실적을 내는 동안 KAI만 빅4 중 유일하게 역성장했다. 공기업 KAI 경영의 패러다임 전환이 그래서 필요하다. 이 기업에는 주인이 있어야 한다. 방산주로 뜨고 있는 주가를 봐도 지금이 민영화의 적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