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은 결코 꺼낼 수 없는 불편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얼마 전 버스 안에서 햇볕을 막으려고 양산을 편 여성의 ‘민폐 논란’ 뉴스를 보고 용기를 냈다.
골목길에서 차 두 대가 마주쳤다. 서로 조금만 비켜주면 무난하게 지나갈 수 있는데, 앞차가 꼼짝도 않는다. 그러면 안다. 상대 운전자가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버스 좌석의 안쪽이 비어 있어도 통로 쪽 자리만 줄지어 앉는 사람들, 교차로 코너에 비상등 켜고 세우면 거기가 주차장인 줄 아는 사람들, 주차장에서 자리를 잡는다며 서 있는 사람들, 왜 그 뉴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여성일까.
안다. 어떤 각도로 움직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섣불리 움직였다가 차 긁을까 봐 무서운 것이다. 버스 안쪽에 앉았다가 나갈 때 통로에 앉은 남성 얼굴에 엉덩이 스칠까 봐 신경 쓰일 것이고, 교차로 코너에 굳이 차를 세운 여성은 아이들 아침거리를 사러 잠깐 김밥집에 다녀온 것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사정들. 그래, 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사회의 구성원이다. 내가 사회에서 겪는 편리함은 타인이 불편을 감수하고 배려해 줬기 때문이다. 내 차 긁어가면서 다른 차 통행하게 비켜주었고, 좀 걷더라도 출퇴근길 통행에 방해 안 되는 곳에 정차하고, 다 같이 덜 좁게 가려는 마음에 좌석을 뒤로 젖히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의 서로를 향한 배려, 그것을 우리는 ‘사회적 배려’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각자의 공간을 최대치로 늘릴 수 있다.
흔히 말한다. “여성들의 배려심이 더 크지 않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여성이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이는 배려심은 남성이 흉내도 낼 수 없다. 그러나 상대가 불특정 다수일 때는 배려심이 실종되는데 그 이유가 뭘까. 인성이 나빠서? 아니다. 평범한 여성들은 범죄 근처에도 안 간 선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배려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는 점에 있다.
‘사회적 배려’처럼 거창한 것은 남성들, 일부 지도층 여성들이나 하는 것이지, 보통 여성들에겐 해당 사항 없는 미덕이었다. 오히려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로 규정되어 배려의 객체로 인식되어 왔고, 스스로도 열외자의 지위를 받아들여 자리매김하였다. 소속된 사회가 남성보다 협소했던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반면 남성들은 군대·스포츠·직장 등 조직 생활을 폭넓게 하다 보니,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다소의 희생과 협업을 감수하는 것이 체화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적 민폐에 여성보다 예민하게 군다. 나의 ‘관심병사적 행태’가 전체에 어떤 나비 효과를 가져오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남성들이 여성들에게서 학교 성적에서 밀리고, 군대도 다녀오고, 취업까지 밀리면서 소외감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럴 때 버스 안에서 양산을 편 여성 같은 그 사회적 무배려가 더욱 잦게 보도되고 마녀사냥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과거에는 여자라고 봐줬지만, 이제는 취업도 빨리되고 집에서는 제왕적 주부로서 권능을 행사하니 더는 이해해 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여 이 글을 쓴다. 조금만 신경 쓰면 피할 수 있는 비난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누구보다도 희생적인데, 무심한 무매너 하나 때문에 과도한 욕을 먹어야 한다면 말이다.
이제는 여성도 배려의 주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사회의 일원으로 대우받고 싶은 만큼 배려도 당당히 베풀어야 한다. 카페 출입문을 남자가 잡고 있다면, 쏙 들어가지 말고 문을 잡고 뒤에 오는 남자를 위해 잡아주고 있어보자. 그것부터 시작이다. 상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