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혁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부위원장

신라 시대 이차돈의 순교는 정치와 종교가 충돌한 결과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교는 이 과정을 통해 신라에서 공인되었다. 과거 종교의 영역에 있었던 순교는 현대 사회에선 정치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일본 아베 전 총리 암살 등 유력 정치인에 대한 테러 시도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거는 단식 같은 일들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의 순교와 그 성격이 다르지 않다.

제정일치 시대에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가 현세의 삶을 다루는 정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건 신성함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세로 오면서 종교는 정치적 기능을 잃고 오히려 신성함에서 멀어져 급속히 세속화의 길을 걸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와 불교의 공염불은 종교의 극단적 세속화를 상징한다.

근세로 오면서 종교의 자리를 정치가 대체했듯, 이제는 AI(인공지능)가 인간 삶의 많은 영역을 대체하고 있다. 이미 창작 영역인 작곡·회화·소설 등에서 AI가 인간을 대체한 지 오래다. AI가 더 진화하면 인간 의사 결정의 보조 수단에서 나아가 의사 결정 주체로 자리 잡을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이미 해외 기업에선 ‘AI 사외이사’까지 등장했다. AI가 독립적인 법인 격이나 의사 결정 주체로 활동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AI가 인간 활동 영역을 대체한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어온 ‘판단의 영역’까지 대신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합리적 결정이 필요한 분야가 AI에 자리를 내줄 수 있다. 구글의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순간, 수천 년간 인간의 것이었던 사고·추론 영역이 AI에 문을 열어줬다. 사법 판단이나 의학 진단처럼 합리적 결정이 필요한 분야에서 인간의 합리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다고 대중이 느끼는 순간, AI는 인간의 판단을 대신하게 될 공산이 크다.

정치 영역도 AI의 영역 확장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미 민간의 많은 분야에서 AI가 인간의 합리성을 보완·대체하는 상황에서 합리적 의사 결정보다는 정치적 갈등으로 비합리적 의사 결정이 반복되면 정치 영역에서 AI가 활약할 날은 멀지 않았다고 본다. AI 사외이사·사내이사의 등장처럼 ‘AI 비례대표·지역구 의원’이 출현할 수도 있다.

종교 영역도 예외일 수 없다. 유럽연합에선 ‘길가메시(죽음을 없애버리려 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프로젝트’로 불리는 생명공학 혁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의 불사(不死)를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에 자본이 투입되는 것이다. AI가 장수와 극락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종교 영역에서도 인간을 대신하는 가정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미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가 종교로서 기능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말이다.

고대와 중세의 제정 일치가 가능했던 건 신성함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인간 주체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종교와 정치 분야에서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를 막을 수 있을까. 현대 인간이 후진적으로 치부해온 제정 일치 시대의 종교·정치가 대중에게 주었던 그 신성함을 회복해야 한다. 종교와 정치가 타인의 영혼·현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기반해 신성함을 되찾으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AI가 종교와 정치를 대체하는 날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