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낮에는 아이돌, 밤에는 악귀를 물리치는 히어로라는 기묘한 조합이 해외 팬들에겐 매력으로 통한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K콘텐츠가 또 한번 증명한 순간이다. 이 말은 과학기술과 디지털 협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기술이 질서를 만들고 권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만든 질서가 세계 표준이 되길 바란다”는 신호로 EU는 AI법을 통과시켰고, 미국은 AI 실천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표준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가 먼저 논의를 시작했고, 누가 논의 자리에 있었는지가 표준의 출발점이자 주도권 경쟁의 시작점이 된다.
지난 4일 우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초로 디지털·AI 장관 회의를 열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회원 경제체 21곳이 참여하는 APEC은 전 세계 GDP의 50.1%를 차지하는 최대 지역 경제 협력체다. AI‧디지털 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한 지금, 유연한 다자 협력의 ‘파일럿 무대’로 이보다 적절한 곳은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단순히 ‘기술을 잘 만드는 나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술을 어떻게 함께 쓰고, 누구와 나누며,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그 질서를 설계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한국은 이미 자격이 충분하다. 세계적인 반도체·AI 기술을 보유했으며, 빠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인프라와 창의적 민간 생태계가 그 기반을 다지고 있다. 또한 제조 기반이 튼튼하고, 산업 현장에서 AI를 실험할 수 있는 최적 테스트베드 환경을 제공한다. 해외 기업들이 자국에선 해볼 수 없는 ‘진짜 AI’를 한국에서 시험하고 싶어 하는 이유다.
다양한 산업에 AI를 접목하는 ‘AI+X’ 전략은 제조, 헬스케어, 금융 등 분야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앞으로 이 융합을 더 전략적으로 확장해 글로벌 AI 융합 생태계를 주도해야 한다. 한국의 강점인 산업 경쟁력, 디지털 인프라, 창의성과 AI 기술이 맞물려야 ‘한국적 해법’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해법이 세계가 주목하는 모델이 되는 순간,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실현된다.
우리는 이제 “혁신으로 도전 과제를 해결하고, 포용으로 디지털 격차를 줄이며, 안전한 신뢰 기반에서 기술을 함께 나누자”는 제안을 국제사회에 내놓고자 한다. 지난 G7 정상회의에서도 한국은 안정적 글로벌 AI 생태계 조성, 민간 참여 촉진을 통한 아태 지역 AI 허브 구축, 혁신의 혜택을 나누는 글로벌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앞으로 AI·디지털 협력은 단순히 누가 먼저 개발하느냐는 문제를 넘어 얼마나 더 많은 이와 함께 쓰고, 어떻게 책임 있게 기술을 운용하고 신뢰를 쌓을지가 관건이다. 기술 발전만큼 중요한 건 협력 방향을 설정하고 주도권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번 APEC 디지털·AI 장관 회의는 그 첫 무대였다. 다양한 경제권이 모여 혁신·포용·안전이라는 공동 가치를 논의한 첫걸음을 한국에서 뗐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생각해 보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전 세계에 통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낯설지만 매력적인 조합, 문화와 상상력, 전통과 기술이 어우러진 서사가 세계를 설득했다.
과학기술과 디지털 협력도 마찬가지다. 한국적 접근이 세계가 함께 나아갈 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모두를 위한 AI, ‘모두의 AI(AI for All)’로 이어져야 한다. 함께 만들고 함께 누리는 기술,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지향할 새로운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