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의 중앙보훈병원은 병상 1400개 규모로 접근성과 진료 인프라 모두 국내 최고 수준을 갖춘 공공 의료기관이다.. 이는 병원 자체의 노력뿐 아니라 오랜 기간 국가가 예산을 투입해 축적해온 자산이다.
그러나 지금 이 상징적 자산은 구조적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전체 환자의 80% 이상이 국가 유공자인데 이들은 대부분 고령이고 자연적으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반면 새로운 국가 유공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다. 전쟁과 항쟁이 없는 시대, 국가 유공자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병원을 건강검진을 비롯한 비급여 진료와 부대사업 중심의 민간 병원처럼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축소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병원과 유관 기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는 단순한 운영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철학과 책임에 대한 물음이어야 한다. 중앙보훈병원은 단지 병원이 아니다. 이 병원은 국가가 시민의 헌신을 어떻게 끝까지 책임지는지를 보여주는 제도이자 상징이다. 그리고 지금 그 상징이 작동할 수 있는 방향을 우리는 다시 정립해야 한다.
지난 2015년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중사는 이 병원에서 맞춤형 의족과 심리 재활, 사회 복귀까지 지원받았다. 국가는 이 헌신을 끝까지 책임졌다. 하 중사는 이후 국가 대표로 패럴림픽에 출전했고, 지금은 제2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국가가 특정한 헌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상적 장면이다.
하지만 모든 헌신이 이런 식으로 기억되는 건 아니다. 지난 2020년 대구에서 코로나19 중환자실에 투입되어 매일 감염 위험을 감내하던 간호사는 외상 후 스트레스로 병원을 떠났지만 아무 보호도 받지 못했다. 그는 국가유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헌신은 제도 밖에 있었고 국가의 기억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이 두 사례는 보훈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준다. 헌신의 방식은 다를지라도 보호받아야 할 권리는 동일하다. 국가의 존속과 안전을 위해 실질적으로 기여한 이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 ‘국가기여자’가 필요한 이유다. 이제 보훈은 과거의 ’희생’을 예우하는 개념에서 현재와 미래의 헌신을 구조화하는 공공의료 플랫폼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소방, 경찰, 군, 교정, 감염병 대응 인력 등은 모두 국가의 존속과 안전을 실질적으로 지탱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을 제도적으로 품고, 그들의 건강과 복무 이후 삶을 국가 차원에서 책임지는 공공 의료 허브가 필요하다.
이미 중앙보훈병원은 이들과 협력하기 위한 양해각서(MOU)를 몇 차례 맺어왔다. 그러나 상징적 선언이나 업무 협약만으로는 공공 의료 허브로의 전환이 불가능하다.
국가 기여자라는 개념을 공식화하고 이를 위한 법과 제도, 예산 구조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 병원이 단지 과거의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철학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
중앙보훈병원이 국가 기여자들을 위한 공공 의료 허브로 거듭나는 일은 단순한 환자군 확대가 아니다. 이것은 국가가 어떤 철학으로 헌신을 기억하고 그것을 제도화하는가에 대한 전환이다. 오늘 우리가 이 변화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내일의 국가는 더 이상 새로운 헌신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