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신임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는 지난 2019년 상원의원 신분으로 한 보고서를 발표하고 금융 산업을 질타했다. 21세기 들어 미국 기업들이 큰 폭으로 투자를 줄였는데 그 원인이 바로 ‘주주 자본주의’와 이로 인한 ‘단기 성과주의’라는 내용이다. 주가나 배당금을 높여야 한다는 주주 가치 극대화가 기업들의 지상 과제가 되면서 경영진이 단기 실적에 몰두하고 장기 투자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설비와 연구개발에 투자해야 근로자의 생산성과 임금이 높아지고 일자리가 생긴다. 따라서 루비오의 주장은 성장뿐 아니라 분배에도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사모펀드와 행동주의펀드 같은 금융 자본의 활동 범위도 급속히 커지고 있는데, 사실상 이들이 주주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핵심 주체다. 이런 금융 자본에 의해 성장률과 기업투자가 급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자본시장 ‘밸류업’ 정책에 대해 보다 폭넓은 범위에서 고민이 필요해졌다. 특히, 밸류업의 단기주의 폐해가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심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의 세 가지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첫째, 제조업 의존도가 높다. 공장과 기계 같은 고정 설비투자는 경기변동 리스크에 특히 취약하다. 이 때문에 사모펀드처럼 수익성 극대화를 추구하는 금융 자본 입장에선 비효율적 지출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경제안보 측면에서 보면 비효율성을 일정 부분 감수하고라도 제조업 생산 기능을 장기적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 수출이 제조업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일종의 보험을 들어야 하는데, 밸류업에 막힐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은 농업과 광업부터 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이 골고루 발달해서 단기주의의 부작용이 한국보다 덜하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선 경제안보를 명분으로 상대적으로 취약한 제조업 부흥에까지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둘째, 대기업 집중도가 심하다. 미국은 시장이 넓고 해고가 자유로운 데다 각지에서 돈과 인재까지 몰려든다. 엔비디아, 테슬라 같은 혁명적 기업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벤처 환경도 열악할뿐더러, 원·하청 관계 등을 통해 많은 비상장사와 중소기업들이 소수 대기업 집단의 직간접적 영향 아래 있다.
게다가 반도체를 비롯한 몇몇 업종의 중요도가 절대적이다. 이들 대기업이 투자를 멈추면 나라 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다. 기존 대기업은 벤처 기업과 달라서 굳이 모험을 하지 않고 현상 유지만 잘해도 일정 기간 이윤을 낼 수 있다. 단기 금융 자본이 탐낼 만한 사업 구조다.
셋째,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크다. 한국은 북한과 대치 중인 데다 중국과 러시아의 한반도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도 궁극적으로 이런 지정학적 환경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불확실성을 상쇄할 특별한 기술력이나 시장 친화적인 제도를 갖춰야만 글로벌 자본의 장기 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이 그렇지도 못하다. 기술력도 문제지만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린 집단 이기주의 때문에 규제 개혁이 좀처럼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본시장을 아무리 선진화한들 글로벌 투자자의 단기 인센티브를 유의미하게 바꾸긴 어려워 보인다.
금융은 시장 실패가 빈번히 발생하고 그 파급효과도 커서 정부의 역할이 특히 요구되는 예민한 산업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기업의 투자가 절실한 때다. 밸류업도 중요하지만 나라의 근간이 단기주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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