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KTX 탄생을 도운 산파였다. 1987년 국토교통부 전신(前身)인 교통부 수송조정국에서부터 고속철도 업무를 맡기 시작했다. 이후 국가교통망을 결정하는 굵직한 업무 보고가 있을 때마다 고속철도 부분이 반영되도록 애썼다. 고속철도 밑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여러 건의 대통령 보고, 결재 문서를 직접 기안하고 작성했다. 2004년 4월 1일, KTX가 처음 운행하는 역사적 순간에는 철도청장으로 밤새 관제상황실을 지켰다. 출발선으로 이동하는 열차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예의 주시했다. 노심초사하며 출산을 고대하는 분만실 아빠의 모습이었다.
KTX는 걸음마도 없이 시속 300㎞ 속도로 우리 산하를 질주했다. 어느덧 20년이 지나 이제는 국민 생활 속에 굳건히 자리 잡았다. 개통 당시 하루 142회였던 운행 횟수는 현재 381회로 2.7배 늘었다. 연간 이용객은 1988만명에서 8401만명으로 4배 이상이 됐고, 운송 수익은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고속철도 수혜 지역을 전국 곳곳으로 확대하며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한 ‘1일 생활권’으로 탈바꿈시켰다.
짧은 시간에 고속철도 시대를 안착시킨 성과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다. 고속철도 기술을 전수한 프랑스 국영철도(SNCF)에서 다시 벤치마킹할 정도다. 개통을 위해 10여 년간 불철주야 헌신한 당시 철도인과 20년간 이끌어온 후배 철도인에게 찬사를 보낸다. 국가적 지원과 사회적 수준, 분야별 기술이 조화되고 국민의 성원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세계 고속철도 역사상 우리만큼 어렵게 개통을 준비한 경우가 없었기에 이런 성과는 더욱 소중하다.
KTX 개통에는 적지 않은 산통(産痛)이 있었다. 경제성은 턱없이 부족한데 수요를 과다 추정했다는 비판, 천성산 도롱뇽 서식지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건 건설 반대, 외국에서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역방향 좌석 논란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대부분 근거 없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고속철도 운영 국가들이 고속선을 새로 깔고 역세권을 미래 도시로 변신시킨 사례와 달리 우리는 큰 틀에서의 국토 개조나 미래 도시 구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24시간 기존 철도를 운영하며 고속철도를 위한 새 노선 건설과 기존 노선을 개량하는 작업을 동시에 해야 했다. 이와 함께 기관사·승무원 교육까지 병행하는 벅찬 상황이었다. 개통을 1년여 남겨두고는 철도 구조 개혁이 시작됐다. 건설·유지 보수 기능 이관과 인력 감축, 고속철도 이관 주장까지 나왔다. 개통 과정에서 안전사고로 인한 희생도 있었다.
돌아볼 때마다 두 번 다시 겪어선 안 될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쓰라린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KTX를 10년 가까이 이용조차 하지 않았다. 성장하는 아이를 외면한 매정한 아비이지만 건강하게 스무 돌을 맞은 KTX에 대한 기대와 바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KTX는 혼자 달릴 수 없다. 건설과 유지 보수, 운영 과정이 궤도·신호·통신·차량 등의 기술과 맞물려 함께 움직인다. 최근 뜨거운 이슈로 부각된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와 철도 지하화 사업도 마찬가지다. 법적·제도적 지원과 기술력, 사회적 합의와 함께 미래 도시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업이 돼야 한다. 철도 산업의 맏형이 된 KTX가 새로운 철도 사업을 이끌면서 대한민국 철도를 혁신하기 바란다. 고속철도 도입 과정의 산고(産苦)를 다시 겪지 않도록 돕고, 20년간 쌓아온 운영 노하우를 전수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