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방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6·25전쟁 참전 중 두 차례 무공 훈장을 받았다는 기록이 확인됐다는 소식이었다. 1951년 11월부터 1952년 2월까지 강원 금화지구, 그리고 1953년 6월부터 9월까지 대구 지역 전투에서의 공적이었다. 세월 속에 묻혀 있던 무공 훈장이 7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 김영광은 1931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6·25전쟁을 겪은 이후 공직 생활과 의정 활동의 길을 걸었다. 지난 기억 앞에서 나는 잠시 먹먹했다. 전쟁은 승리의 서사이기 전에 상실의 기록이다. 아버지는 치열했던 기억을 침묵 속에 묻어두셨다. 그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먼저 떠난 전우들에 대한 미안함,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의정 활동을 하면서도 늘 제도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데라우치 총독 관련 도서 반환과 청산리 대첩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는 아버지를 보며 의아했다. 가시적인 성과도, 정치적 이득도 분명하지 않은 일에 왜 그토록 매달리는 걸까. 전쟁을 겪은 그는 기억의 공백이 공동체를 얼마나 약하게 만드는지 몸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더 먼 시간을 바라보는 정치를 택했고, 사회적 갈등을 낮추는 길로서 ‘민족 정체성’이라는 가치를 붙들고자 했다.
아버지에게 안중근은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유해조차 돌아오지 못한 현실은 국가가 아직 다하지 못한 책임을 의미했다. 그래서 유해 찾기는 개인적 관심이나 역사 취미가 아니라 국가가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책임을 묻는 작업이었다. 아버지는 중국과 일본을 수차례 오가며 자료를 찾고 증언을 모았다. 유해를 찾지 못하더라도 과정을 통해 사회가 무엇을 잊고 있는지 드러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봤다.
누군가는 효율과 성과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실효성 없는 일’이라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경제적 성장과 제도의 정비만으로는 공동체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공동체를 다시 묶는 힘은 물리적 억압이나 이념의 칼날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함께 지켜왔는가를 함께 기억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려지고, 확인되고, 사회적으로 호명될 때 기억은 힘을 갖는다. 사회 갈등이 만연한 공동체를 다시 묶는 힘은 결국 기억과 예우에 있다.
기억의 문제는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6·25전쟁 속 이름 모를 영웅들이 있었고, 그 기억을 복원하려 한 세대가 있었으며, 오늘도 군복을 입고 국가의 이름으로 복무하는 세대가 있다. 내 아들도 그중 하나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책임은 여전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책임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억되고 어떤 예우로 돌아오느냐다. 공동체의 구심이 되는 민족 정체성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희생을 개인의 미담으로 소비하지 않고 공적 기억으로 세울 때 비로소 형성된다.
훈장을 받아 들면서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던 사람, 그러나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분명한 사람이었다. 더 좋은 나라는 더 빠르게 성장한 나라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가진 나라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삶으로 보여줬다. 아버지의 기억 위에서 다시 하나 된 우리나라의 의미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