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조선비즈닷컴과의 인터뷰에서 FTA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Pacta sunt servanda(계약은 지켜져야 한다).’ 근세 이후 시민사회와 시장 질서를 지탱해 온 기본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악질적 계약에 대한 명쾌한 응징도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자유의사에 반해 채택된 것이 아닌 한 어떤 합의도 지키는 것이 맞다. 그런데 지난해 체결된 한·미 관세 협상 결과에는 걱정되는 내용이 많아 이행이 살얼음판 걷듯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재인상 발언 이후 한·미 정상간 핫라인 가동 여부가 이슈가 되고 있다. 사진은 이재명 대통령(오른쪽)과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는 모습./대통령실

첫째, 우리 정부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달러(약 500조원)부터 보자. 그 약속은 우리보다 앞서 미국과 합의한 EU(6000억달러), 일본(5500억달러)과 경제 규모를 비교할 때 지나치게 크다. 이 액수가 도출된 근거는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둘째, 미·EU 공동성명에는 “유럽 회사들이 투자하기를 기대한다”고 돼 있다. 즉, EU는 투자의 주체도 기업이고, 투자할지 말지도 기업의 결정에 달린 것이다. 일본은 이행 주체가 일본 정부로 돼 있지만, 미 의회조사국이 올린 자료에는 “일본국제협력은행(JBIC) 등을 통한 대출 및 대출 보증의 형태”라는 일본 측 입장을 그대로 수록하고 있고, 특기할 만한 반론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일본 내에서 우려하는 동향이 없고, 일본 정부도 합의 이행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 경우에는 정부가 3500억달러라는 숫자를 내놓을 때 현금은 5% 수준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대출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런데 곧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이 액수 전부 현금이고 선불”이라고 거칠게 압박한 것을 기억한다. 나라 간 협상이 이렇게 널뛰기를 할 수 있나? 결국 경주 정상회담 때 ‘1500억달러(조선)+매년 200억달러X10회=3500억달러’로 합의됐다. 물론 우리 기업들의 개별 투자 또는 미국산 항공기 등 구매는 별도다.

셋째, 정부는 우리 외화 자산의 수익금과 정부채 발행 등으로 매년 200억달러 조달은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2025년 서학개미들이 미국 주식시장에 투자한 순매수액이 전년 대비 200억달러 정도 늘어난 것이 원화환율을 올린 원인 중 하나라면서, 정부가 이들이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것을 보면 200억달러는 우리 외환시장에서 결코 가볍게 볼 액수가 아니다. 한미간 합의서(Fact Sheet)도 한국 정부는 외환시장의 안정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시장조달이 아닌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이 투자가 원리금 상환이 보장된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미국이 신의·성실 원칙에 따라 그렇게 노력하겠다는 것일 뿐이다. 투자는 잘하면 잉여현금흐름(이익)이 생기지만 잘 못하면 손해보고 마는 것이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이 투자가 새끼를 쳐서 돌아오기를 바란다.

넷째, 정부는 상기와 같은 약속의 대가로, 우리 수출품에 대한 미국의 상호관세가 25%에서 15%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실은 한미 FTA로 도출된 0%에서 15%로 올라간 결과라서, 미국과 FTA가 없던 EU나 일본보다 관세 증대 폭이 높아 우리 기업들의 부담은 훨씬 크다. 더 이상한 것은 미국 상품에 대해 우리가 매기는 수입 관세는 예나 지금이나 한미 FTA를 적용해 대부분 0%인 상황이다. 한미 FTA상의 수입 관세를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 관세’ 부과에 대해 미 대법원은 조세에 관한 의회의 권한을 침해했다며 위법 판결을 내렸다. EU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한미 FTA라는 양자 협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 협정은 2011년 10월 미국 상·하원의 표결을 거쳐 승인된 것임에도 트럼프에 의해 무력화됐다는 점에서 미 대법원 판결의 핵심적 논리와 직결된다. 정부는 한미 FTA의 효력을 복원하기 위한 치밀한 외교 전략을 준비하고 추진하기 바란다. 국익과 실용 외교 구현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다.

우리 정부는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작년 11월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올 초 우리 국회의 관련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고 강한 불만을 표명했다. 특별법(안)은 한시적으로 투자 공사를 설립하여, 그 공사에 정부와 한국은행이 보유하는 외화 자산을 인출·사용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매년 미국이 요청하면 45일 안에 200억달러를 마련해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 내용을 쉽게 삼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한·미 FTA는 매국 행위, 미국의 ATM 노릇”이라고 비난하고 반대한 전력이 있는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심정이 복잡하지 않을까 짐작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압적이고 오만한 레토릭으로 미국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식어가고 있지만, 합의한 내용은 지켜져야 한다. 다만 그 내용에 무리한 점이 많아 이행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 때는 사정 변경에 따른 재논의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렇다고 고의로 사정 변경을 꾸며내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과 그에 따른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는 별개로 하고, 일단 합의는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당장의 첫걸음이고 외교와 대외협상의 무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