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겨울의 일이다. 책 담당 기자이던 나는 미국 보수 지성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데이비드 브룩스의 ‘인간의 품격’을 Books 톱 기사로 소개했다. 성공과 경력 같은 외적 성취보다 정직, 겸손, 용기 같은 내면의 성장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을 만든다는 통찰이었다.
마침 그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도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추천했다. 그는 “우리가 왜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어떻게 인격의 토대를 닦을 수 있는지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고 썼다. 자신의 엄청난 성공은 오로지 독서 덕이라며 매년 정성스러운 추천 리스트를 발표하던 그는 당시 ‘세인트(Saint·성스러운) 빌’로 불렸다. 겸손과 품격의 상징처럼 행동하며 천문학적인 자선 사업을 벌이는 그를 세상은 기꺼이 신뢰했다.
하지만 지금 그 성자(聖者)는 비웃음의 제물이 됐다. 최근 그의 공식 사과로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엡스타인 파일’은 우리가 알던 박애주의자의 가면을 사정없이 찢었다. 아동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만남이 자선 사업 때문이었다는 과거의 변명은 이제 힘을 잃었다. 러시아 출신 여성들과의 부적절한 혼외 관계, 엡스타인의 협박, 여기에 성병 감염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그가 평생 외쳐온 ‘투명성’과 ‘정직’이라는 가치는 악취 나는 오물 속에 처박혔다.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인격을 닦으라 설교하던 이가, 정작 자신의 삶은 기만으로 도배하고 있었던 셈이다.
위선의 대열에 또 한 명의 ‘위인’이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으로 추앙받던 노엄 촘스키다. 미국을 ‘세계 최대의 테러 국가’라 일갈하고, 강대국의 학살에 침묵하는 지식인들을 향해 ‘범죄의 공범’이라 포효하던 촘스키였다.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닦아주라던 그의 손은, 그러나 정작 막후에서는 아동 성범죄자의 금융 계좌를 빌려 사적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건강 악화를 이유로 가족이 대신 내놓은 해명은 “배경을 몰랐던 실수”라는 것이었지만, ‘엡스타인은 죗값을 치른 사람(Clean slate)’이라며 범죄자를 옹호하던 그의 육성은 촘스키를 추종하던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말의 성자들이 ‘행동의 죄인’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목도해 왔다. 입으로는 ‘개천의 가재’들을 위로하면서 뒤로는 자녀를 위해 ‘황금 사다리’를 가공했던 법대 교수, 여성 인권을 사자후처럼 외치면서 침실에선 위력으로 약자를 짓밟았던 정치인, 평화를 노래하며 술자리에서 추태를 일삼던 문단의 거인까지.
촘스키의 정의와 게이츠의 박애가 엡스타인의 검은 이메일 속에서 난도질당하는 모습은 현대 지성사의 비극이다. 화려한 수사(修辭)에 취해 사람을 우상화하고 생존 인물을 위인전에 올리던 시대는 끝났다. 결국 남는 것은 그가 뱉은 고결한 문장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살아낸 행동뿐이다.
지식인의 위선은 대중의 무지보다 위험하다. 무지는 단순히 모르는 것에 그치지만, 위선은 고결한 지식을 기만의 도구로 삼아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근본부터 썩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화부 기자로 수많은 지식·예술인을 만나오면서 깨달은 진실이 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볼 수 있는 건 그의 행동뿐이다. 인격은 화려한 추천도서 목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끝까지 지켜보는 것. 그것만이 이 악취 나는 위선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