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 /뉴스1

이재명 정권 사람들은 자기네를 실용(實用) 정부라고 한다. ‘실용’이란 명분(名分)에 구애받지 않고 실리(實利)를 선택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국제 정치에서 ‘실용’은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取)하는 노선이다. 현실주의와 비슷하다. 실용이 길을 잘못 들면 임기응변(臨機應變)만 좇게 되고 그때그때 편하고 쉬운 길을 택하다가 봉변을 당하는 일도 생긴다. 얼마 전 한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진 일은 ‘좌파 실용 정권’이 맞게 될 만만치 않은 도전을 예고(豫告)한다.

24일 밤 10시 주한(駐韓) 미군 사령관은 한국 국방부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과거에 없던 일이다. 사태의 발단은 주한 미 공군의 서해 상공 훈련이다. 지난 18일 오산 미군 기지에서 발진한 10여 대의 F-16 전투기들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과 중국방공식별구역(CADIZ)이 겹치는 구역에서 중국 전투기와 한동안 함께 비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군 전투기들이 중국 방공식별구역에 접근하자 중국이 견제용으로 전투기를 띄운 것이다.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에서 최근 자주 빚어지는 사태다.

그다음 단계에서 사태가 꼬였다. 한 언론이 이 사태에 대해 주한 미군 사령관이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고 보도하고 한국 국방부가 ‘그 보도가 맞다’고 확인했다. 주한 미군 사령관은 미 공군의 훈련 계획을 사전에 한국 국방부에 알려줬는데 무슨 말이냐고 항의한 것이다. 미군 체제에서 이런 결정은 주한 미군 사령관이 단독으로 내리지 않는다. 상부 지침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미국은 이 문제 배경에 중국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의심한다고 한다.

한국군과 미군은 3월 9일부터 ‘자유의 방패’라는 합동 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미군 병력과 장비 일부는 이미 미국 본토를 출발해 한국에 도착했다. 이 상황에서 한국은 한·미 기동 훈련 규모를 대폭 축소하자고 미국에 요청했다. 문재인 정권에 이어 이 정권도 훈련을 코앞에 두고 ‘날짜를 변경하자’ ‘규모를 줄이자’를 반복하고 있다. 미국 측 성명 속 “우리는 전투 대비 태세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미국의 짜증이 읽힌다.

지난 16일과 18일에 동중국해와 동해에서 미 공군과 일본 항공 자위대의 합동 훈련이 실시됐다. 원래는 한국·미국·일본 3국 훈련으로 예정됐으나, 한국이 일본을 제외하자고 하자 미국은 한국을 빼고 미·일 합동으로 실시했다. 북한과 대화를 트고 중국을 배려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빚어낸 일이다.

자기 나라 영토에 주둔하는 동맹국 군대의 행동 반경을 어느 만큼 허용하느냐는 까다로운 문제다. 잘못 다루면 동맹이 망가진다. 주둔하는 강대국은 ‘통고(通告)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상대국은 ‘논의(論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큰 쟁점(爭點) 중 하나가 한국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이 오키나와 기지를 얼마만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주한 미군의 탄약고(彈藥庫)와 긴급하게 달려올 미 공군 주력(主力)이 오키나와에 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군의 오키나와 기지 자유 사용 허용을 미·일 양국에 강력하게 요청했다.

1969년 11월 닉슨 대통령과 사토(佐藤榮作) 총리가 워싱턴에서 오키나와 반환 협정을 체결했다. 그 기자 회견에 앞서 미 국무 차관은 미국 기자들에게 ‘한국 유사시(有事時) 일본이 미군에게 기지 사용을 얼마만큼 자유롭게 허용할 것인지’를 질문하도록 유도했다. 공개 석상에서 확답을 받아내 일본이 마음을 바꾸지 못하도록 못을 박으려는 의도였다.

사토 총리 답변은 이랬다. “한국에 대한 군사 공격은 일본 안보를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다. 한국 유사시엔 미군의 기지 사용을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허용하겠다.” 사실상 미군이 무제한으로 기지를 사용하도록 허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이다. 이로써 한·미 안보 조약 속 미국의 한국 방위 공약은 실행 가능한 약속이 됐다. 일본은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 69년 (사토의 기지 사용 허용)은 69년이고 올해는 69년이 아니지 않느냐”며 입장을 바꿔 한국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시절 미국과 일본은 한국 방어가 동북아 안보에 ‘필수적(essential)’이라 했고, 대만 방위는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중요한(important)’이라고 표현했다. 세월이 그걸 거꾸로 뒤집었다. 미국도 일본도 대만 방어를 ‘필수적’이라 여기면서 ‘한국 방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이재명 정부는 누울 멍석이 깔려있는지 확인하고 ‘실용 외교’를 펴야 한다. 최악의 경우지만 트럼프는 미군의 한국 주둔이 수지(收支)가 맞지 않는 투자라면 미군을 일본으로 빼겠다고 위협할 수도 있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