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12월 17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행정안전부·인사혁신처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재래식 언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뉴스1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많이 닮았다. 온갖 혐의로 숱한 재판을 받으면서도 기어코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었다. 트럼프는 이 기적 같은 과정을 ‘신(神)의 개입(Divine Intervention) 덕분’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그걸 ‘상대가 자빠져줬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이 대통령에게서 좀체 듣기 힘든 군더더기 없는 겸손한 말이다. 실제가 그랬다. 윤석열 같은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이재명 대통령도 없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자기 나라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시각은 나라 안팎에 존재한다. 물론 세계 속 국가의 위상(位相) 차이 때문에 민주주의 위기론(危機論)이 미국에선 크게 들리고 한국에선 작게 들리는 착시(錯視) 현상이 있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몸이 물에 잠기듯 헌법과 법률과 전례(前例)가 소리 소문 없이 허물어지는 걸 연성(軟性) 독재라고 한다.

트럼프와 이재명 대통령의 공통점은 집권 과정과 집권 이후 역사가 오랜 언론을 첫 사냥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뉴욕타임스를 본명으로 부르지 않고 ‘곧 망할 신문’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름 고쳐 부르기’의 효과를 계산했다. 권위에 상처를 입히면 신문의 신뢰도가 흔들릴 걸 기대한 것이다. 뉴욕타임스 사주(社主)인 발행인 설즈버거는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나 “우리 신문이나 나 개인을 공격해도 괜찮다. 그러나 민주적 토대가 약한 나라 지도자들이 당신을 본받고 따라 할 것이란 사실은 알아야 한다”고 했다.

트럼프가 여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 대통령의 최근 말과 행동은 트럼프가 혼자 외로운 처지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대통령은 작년 말 각 부처 업무 보고 자리에서 “특정 언론, 요즘은 ‘재래식(在來式) 언론’이라고 부르던데, 그런 언론은 사실을 스크린해서(걸러서) 자기들이 필요한 것만 전달하고 나머지는 가리거나 살짝 왜곡해서 국민이 많이 휘둘렸다”고 했다. ‘재래식 언론’이란 말은 김어준씨가 대표인 ‘딴지일보’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만들고 노무현재단 전 이사장인 유시민씨가 최근 다시 유통시키고 있는 단어다. 족보(族譜)가 김어준-유시민-이재명으로 이어진다.

‘재래식’의 반대어는 개량형(改良型) 또는 ‘현대식’이다. 그런데 화장실을 가리킬 때만 ‘재래식’의 대칭 단어가 ‘수세식(水洗式)’이다. 대통령이 어떤 맥락·어떤 의도로 이 단어를 들먹였는지 깊이 캐볼 필요가 없다. 트럼프가 뉴욕타임스지를 ‘곧 망할 신문’ ‘망가진 신문’이라고 부른 것과 한가지다. 입이 험한 트럼프지만 이 대통령에 비하면 입 냄새가 덜한 느낌이다.

사실 트럼프는 역사가 긴 언론에 대해서 원한을 가질 만하다. 미국 수도에서 발행되는 워싱턴포스트는 정치인 발언의 거짓말 여부를 가리는 ‘팩트체커(fact checker)’ 코너를 15년 동안 운영했다. 이 코너에 따르면 트럼프는 첫 임기 동안 3만573건의 거짓말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첫 100일 간 492건의 허위 발언을 했고, 임기 말까지 하루 평균 21건의 거짓말을 한 걸로 집계(集計)됐다. 트럼프 입장에서 이렇게 따라다니며 검증하는 언론이 얼마나 지긋지긋했겠는가.

민주당 계열의 첫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재래식 대통령’이었다. 앞서 한 말을 뒤집거나 거짓말을 했다는 비판을 받으면 몹시 괴로워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半)은 재래식’ ‘반은 수세식(水洗式)’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단추 하나 눌러 물에 흘려보내는 걸 창피스럽게 여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수세식’이었다. 취임사에서 국군(國軍)의 역사를 거짓으로 지어내고 임기 내내 적폐(積弊) 청산을 사실과 다르게 둘러대고 흘려보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보다 많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보통 정치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짓말을 많이 한 건 본인도 부인하지 못한다. 한국에는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처럼 집요하게 대통령의 거짓말을 체크하는 ‘재래식 언론’이 없다. 이 점 ‘재래식 언론’에 몸담은 기자로서 독자에게 면목이 없다. 그러나 ‘수세식 대통령’에게 ‘재래식 언론’ 운운하는 말을 듣는 건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설즈버거 발행인은 민주주의와 자유 언론의 관계에 대한 강연의 마지막을 트럼프에게 던지지 않고 독자를 향한 당부와 부탁의 말로 맺었다. “(역사가 오랜 신문을) 읽으십시오. (전통 언론의 뉴스를) 들으십시오. (현실을) 보십시오.”

뉴욕타임스의 아서 그레그 설즈버거(Arthur Gregg Sulzberger) 회장 겸 발행인이 2023년 10월 19일 서울대 체육문화교육연구동에서 '자유 언론에 대한 위협(The Threat to the Free Press)'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