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묘에 대한 ‘도시 전설’이 있다. 일제가 한국의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도로(지금의 율곡로)를 만들어 왕조의 맥을 끊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선 후대의 민족 정서가 만들어낸 근거 없는 전설로 오래전에 부정됐지만, 종묘 단맥설은 ‘쇠말뚝 전설’과 함께 일제의 횡포를 뒷받침하는 전설로 종종 등장했다. 이 담론이 김민석 총리의 발언으로 되살아났다. 그는 종묘광장공원 건너편 세운상가 재개발에 대해 “종묘의 기(氣)가 눌린다”며 “턱 하고 숨이 막히는 기가 막힌 경관”이라고 했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이야말로 기가 막힐 듯하다. 율곡로를 지하화해 창경궁과 종묘를 다시 하나로 복원한 시장이 그이기 때문이다. 김 총리의 풍수적 식견에 따르면 그는 ‘일제가 단절한 종묘의 기를 100년 만에 뚫어준’ 시장이다. 오 시장은 종묘만 연결한 게 아니다. 한양도성 성곽길을 연결해 거대한 산책로를 만들었고, 광화문 대로에 월대를 만들어 사실상 경복궁 복원의 마침표를 찍었다. 서대문까지 복원하겠다고 한다. ‘조선 사랑’이 지나치다고 비판받을 수 있어도, ‘조선 홀대’로 욕먹을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힘 한번 실어준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떼로 몰려나와 종묘의 존엄을 말하니 기가 막히지 않겠나.
다들 아는 것처럼 정치 때문이다. 조선의 문화유산을 극진히 사랑해서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서도 아닐 것이다. 오 시장의 사업을 무산시키고 망신을 주려는 목적이 전부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을 탈환하겠다는 일념이 이 정부 인사들을 난데없는 ‘문화재 탈레반’으로 만들었다. 정치 싸움은 알아서들 하면 된다. 문제는 정치에 도시 문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화’는 기업 하나, 산업 하나,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말아먹을 만큼 독소적이다.
서울 도심은 특이하다. 왕궁을 중심으로 도심이 방사형 또는 격자형으로 뻗어 나가는 베이징이나 도쿄와 달리, 5개 왕궁과 종묘가 도심을 에워싸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뭉개지 않고 산의 흐름에 따라 왕궁을 건설한 도시 설계의 철학 차이 때문이다. 자연스럽고 아름답지만 근대 이후 도심이 왕궁에 갇히는 구조가 됐다. 왕궁 보호를 위해 주변 규제를 강화하면 서울 도심 전체가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종묘 주변을 걸어 보면 누구나 안다. 선진국 대도시라면 도심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품격이 있다. 영세한 건물이 종묘를 에워싸고, 그곳을 벗어나면 무색무취한 술집과 러브호텔이 즐비하다. 익선동 한옥 골목과 서순라길 정도가 종묘의 정취에 어울리지만 이 역시 식당과 술집 이상이 아니다. 김 총리는 세운상가 재개발이 “종묘의 탁월한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했는데, 그 탁월한 가치는 이미 왕궁이 박제한 낙후 공간에 의해 40년 동안 훼손돼 온 것이다. 주민들의 삶의 문제이고, 서울을 ‘삼류 도시’ 소리 듣게 하는 도시 기능의 문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전임 오 시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강북 재개발을 엉망으로 만든 것처럼, 서울 도심 문제까지 정치화하면 또 10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정반대 측면에서 도시 개발의 정치화가 가져온 극단적인 사례가 대장동 문제다. 사법적으로 대장동 개발은 성남시 공무원과 투기 세력이 결탁해 시민에게 천문학적 손실을 입힌 사건이지만, 정치적으론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경기도지사를 목표로 업적을 이루기 위해 서둘다가 대장동을 투기 판으로 만든 행정 실패의 사례다. 이 시장은 성남시민에게 나눠줄 현금 배당 자금이 필요했고, 이 자금을 확정 이익으로 보장받은 뒤 거의 모든 대장동 개발을 투기 세력에 내맡겼다. 정치적 목적 이외에 대장동 개발의 도시공학적 의미, 개발 이익을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배분하는 문제는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세운상가가 아니라 이런 경우를 두고 “공간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폭력적인 도시 개발”이라고 한다. 대장동 주민의 존엄도 정치적 목적에 훼손당한 것이다. 느닷없는 항소 포기로 대장동 일당의 부당 이익 7000억원을 보장하고 이 대통령이 설계한 대장동 개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정부다. 이런 정부가 “종묘의 존엄”을 들먹이면서 낙후된 서울 도심의 재생 몸부림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은 무언가 기괴하지 않은가.
그들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면 그만이다. 선거가 끝나면 종묘와 주변 주민의 삶을 거들떠도 안 볼 것이다. 도심 재생은 어차피 서울시장의 의무다. 서울은 경제, 문화적으로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역사책에나 등장하는 조선 왕실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 보고 느끼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서울 도심은 재편돼야 한다. 서울의 위상에 걸맞게 “턱 하고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지게 바꿔야 한다. 대장동처럼만 안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