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나란히 앉아 사이 좋게 담소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헌법은 두 사람더러 그러라고 한다. 헌법 90조는 ‘국정 중요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국가 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고 그 의장은 직전(直前) 대통령이 맡는다’고 돼 있다. 헌법대로라면 문재인 대통령·박근혜 자문회의 의장, 이명박 대통령·노무현 자문회의 의장이란 정치 커플이 탄생했을 것이다.
87년 헌법이 만들어진 이후 헌법 90조가 실제 운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90조는 87년 헌법의 사족(蛇足)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족은 아니다. 현행 헌법이 얼마나 어렵게 탄생했는가를 알려주는 화석(化石) 증거이고, 대통령 재임 중에 퇴임(退任) 후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시도는 모두가 헛되고 부질없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교훈이다.
현행 헌법은 야당 투쟁과 6·10 항쟁의 산물이다. 저항에 부딪힌 절대 권력 전두환 대통령은 후계자 노태우를 내세워 직선제 헌법 개정을 받아들이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헌법 개정 작업은 난산(難産)이었다.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현 대통령이 평화적으로 물러날 길을 터주는 게 가장 어려웠다. 잘못하면 민주화의 흐름이 역류(逆流)할 위험도 있었다.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내고 군사 정권과 타협했다. 노태우는 후계자도 믿지 못하는 전임자를 안심시켜야 했다.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조항은 그렇게 헌법에 들어갔다. 1948년 제헌(制憲) 헌법과 그 이후 헌법 개정은 정치 세력 간 정치 타협의 산물이다. 유신(維新) 헌법만이 예외다.
다들 헌법 개정안을 보고 ‘상왕(上王) 통치 헌법’이라고들 했다. 현 대통령 위에 전임 대통령 있다는 야유다. 전두환은 헌법의 신변 보장 장치를 진짜 믿은 듯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여 일해(日海)재단이란 퇴임 후 활동 공간도 마련했다. 꿈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몇 달도 걸리지 않았다. 후임자 쪽에서 불법 재산 축적 비리(非理) 내용을 은밀하게 시중에 흘리자 전두환은 두 손을 들었다. 결국 강원도 인제 궁벽한 시골 절 부엌 딸린 단칸방에서 부인과 1년을 보냈다.
이재명 대통령은 두 개의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다. 5개 형사 재판 피고인 신분을 정리하지 않고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시한(時限)폭탄을 품에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는 불발탄(不發彈)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하나는 4년 6개월 후 임기가 끝나면 폭발하도록 정확한 시간이 입력(入力)돼 있다.
공직자선거법 위반 사건은 대법원이 유죄(有罪) 취지로 고등법원에 되돌려보냈다. 고등법원은 대법원 판결을 따르게 돼 있어 재판이 재개(再開)되면 유죄가 확정된다. 대장동 사건 주범과 북한 불법 송금 사건 주범은 각각 7년 8개월·8년의 중형(重刑)을 선고받았다. 대통령도 같은 사건으로 재판 중이었다. 재판부는 대통령은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헌법 84조를 들어 모든 재판을 중단했다.
‘형사상 소추’가 ‘수사와 기소’만을 의미하는지 ‘진행 중인 재판’도 포함되는지는 의견이 갈린다. 헌법에 이 조항을 둔 이유가 ‘대통령이란 특수 직책의 원활한 수행을 보장하고 국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재판 역시 중단된다는 해석이 조금 더 유력하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가 종료되면 모든 재판이 다시 진행된다는 데는 이견(異見)이 없다.
대법원장을 쫓아내도, 대법관을 26명으로 늘려도, 재판 4심제(審制)를 도입해도, 형법 조항에서 ‘배임죄’를 빼버려도 그날은 온다. 정청래 대표·추미애 법사위원장·최민희 과방위원장 등이 ‘대통령 재판 중지법’을 만들겠다고 소동을 피워도 그날은 온다. 그들 행동은 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만들 뿐이다. 내려오지 못하면 그 끝은 생각하기도 무섭다. 헌법 속에 파놓은 방공호도 퇴임 대통령 안전을 보장 못 했다. 법률 몇 개 뜯어고친다고 대통령이 안전해지겠는가.
길은 하나뿐이다. 대통령을 반대하는 국민들을 인정하고 타협의 정치로 나가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대통령을 반대하는 세력의 작은 일부다. 인정해야 한다. 대통령과 정청래 대표가 야당일 때 어땠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대통령의 불안정한 법적 신분은 국정 운영을 왜곡할 위험이 크다. 대통령도 사람이다. 퇴임 후가 불안하면 국민의 환심(歡心)을 사 자신을 보호하는 울타리로 삼으려는 포퓰리즘으로 흐르게 된다. 벌써 그럴 조짐이 보인다. 세계가 바뀌는 이 전환기에 한국만 실기(失機)하게 된다. 퇴임 대통령의 안전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려면 대통령과 민주당이 먼저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