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흔여섯 장화신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TV 음식 프로그램의 맛 조리법을 따라 적는다. 예전엔 꼿꼿한 전사(戰士) 같은 필체였지만, 이젠 나폴나폴 흔들리는 아지랑이 같은 글씨. 맏딸 이원주씨는 어머니의 글씨가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자식들도 손주들도 각자의 손글씨로 우리 가족의 추억을 남기면 어떨까.” 원주씨 4남매뿐만 아니라 사위, 며느리, 손주가 모두 참여했다. “손글씨 덕분에 장화신 여사의 열다섯 열매가 다들 단단해졌습니다.”
#2. 경희의료원 수술실 간호사 조향미씨는 동료들을 설득했다. 처음엔 개별 응모만 할 생각이었지만, 주변을 보니 다들 독서를 사랑하고 필사가 취미인 선후배들이 많았다. “18도의 낮은 수술실에서 차가운 스테인리스 기구만 만지며 힘들고 삭막한 하루를 보낸다고만 생각했는데, 다들 마음속에 손글씨로 써 내려갈 따뜻한 글귀 하나씩 품고 있더라고요.”
22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홀. 올해로 11회를 맞은 교보손글씨대회 시상식이 열렸다. ‘손으로 한 줄, 마음을 적다’를 대표 구호로 삼은 이 대회에 올해만 7만5134명이 응모했다. 2016년의 3479명에 비하면 20배 넘게 늘었고, 작년보다는 3배나 급증한 수치다. 소셜미디어와 숏츠가 압도하는 2025년의 디지털 대한민국에서 아날로그 손글씨의 조용한 반격인 셈이다. 아동·청소년·일반 부문 합쳐 10명이 으뜸상을 받았고, 앞서 언급한 장화신씨 가족과 경희의료원 수술실 간호사 등 5팀이 단체상을 받았다.
교보손글씨대회뿐만 아니다. 네이버의 ‘한글 한글 아름답게 손글씨 공모전’도 해마다 인기를 얻고 있고, 교육 출판 전문 기업 미래엔의 ‘톡톡 손글씨 공모전’도 초등생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잘 쓴 글씨보다 진심의 글씨
손글씨는 느리지만 진심이 있고, 쓴 사람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이날 단체상을 받은 대구 강림초등학교 4학년 김수진 담임교사는 “이번 대회를 준비하며 ‘잘 쓰는 글씨’보다 ‘진심이 담긴 글씨’가 더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투박하고 서툴지만, 마음과 정성이 모였기에 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손글씨 열풍은 어린이와 성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초등생 2만1000명, 중학생 1만1000명, 고교생 3800명, 성인 4만명 등 모두가 참여했다. 심지어 엄마랑 손 붙잡고 함께 쓴 한 살 어린이부터 95세 노인까지 펜을 잡았다. 외국인도 434명이 응모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이런 에피소드도 화제가 됐다. 2000년대 이전에 군 복무한 세대라면 속칭 ‘차트병’을 기억할 것이다. 글씨나 그림이 장기인 행정병이나 정훈병이 교육 자료를 전담해서 작성하던 시절 이야기다. 그런 아날로그 시절 문화를 모르던 한 MZ세대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근무하는 경비아저씨의 ‘차트병 필체’에 반했던 것.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 아파트 제3초소 아저씨 글씨체를 꼭 응원하고 싶어요. 주인공 경비 아저씨가 내일 근무를 하신다고 하니 꼭 대회에 참가하실 수 있도록 독려할게요.” 그는 그 필체를 ‘제3초소체’로 명명했다.
손글씨 열풍에는 필사 인기도 포함된다.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 같은 책이 10만 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고, 헌법 전체를 필사하는 책도 인기를 끌었고, 시·소설·명언, 좋아하는 가수의 노랫말 등을 직접 따라 쓸 수 있도록 구성된 필사 전용 도서도 대형 서점의 매대 하나를 별도로 차지하고 있다.
‘캘리그라피’의 대중화와 전문화 덕도 있다. ‘아름다운 손글씨’라고 할 만한 캘리그라피는 영화 포스터, 드라마 제목, 서점의 입간판, 상품 패키지 디자인 등 다양한 상업적 영역에서 활용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 중이다.
디지털 시대의 기술 발전은 손글씨의 특별함을 부각시키는 역할도 한다. 개성 있는 손글씨를 폰트로 만들어 개인 소장하거나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등 ‘나만의 글씨’를 가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획일화된 디지털 폰트와 차별화된,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경험이다.
◇손글씨는 일종의 ‘도파민 단식’
디지털 시대, 손글씨는 왜 사랑받는 것일까. 주지하다시피 현대 사회는 높은 수준의 도파민을 분비하게 하는 끝없는 자극으로 가득하다.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짧은 동영상, 비디오 게임, 자극적인 음식, 과도한 쇼핑, 심지어는 불필요한 대화나 신체 접촉도 마찬가지다. 눈의 피로는 물론 수많은 정보와 알림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정신적인 피로와 산만함을 경험한다. 종이에 펜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는 오로지 한 가지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뇌에 휴식을 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 장기적인 집중력에도 도움이 된다. 일종의 ‘도파민 단식’이라 부를 만하다. 앞서 언급한 ‘손으로 한 줄, 마음을 적다’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도파민에 지친 현대인의 뇌 한구석을 건드렸을 것이다.
손글씨문화확산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시인 신달자씨는 “손글씨는 손으로 쓰지만 온몸과 정신의 힘으로 작동된다”면서 “정서적 훈련과 인성의 성실성이 저절로 활성화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한다”고 했다. 손글씨 예찬론자인 가수 김종진씨는 “손으로 그린 악보를 연주자에게 건네면 컴퓨터로 프린트한 악보보다 훨씬 풍부하고 남길 만한 좋은 연주가 나온다. 그게 바로 손글씨의 힘”이라고 했다.
교보손글씨대회 담당 양진영 팀장은 “디지털 환경이 빠르게 정보를 소비하도록 만들지만, 손글쓰기는 마음을 정리하고 집중력을 높이며 창의성을 자극하는 고유한 힘을 가진다”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을 이루는 손글씨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인용 도서 1위는 ‘어린 왕자’, 2위는 ‘긴긴밤’
손글씨 대회 응모자들은 어떤 책을 많이 필사했을까.
부동의 1위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11회를 맞은 대회에서 한 번도 왕좌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주최 측이 특정 도서 리스트를 제공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응모 규정은 “감명 깊게 읽은 ‘책 속 문장’을 골라 손글씨로 작성하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어린 왕자’는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별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나 관계의 본질과 순수함을 깨닫는 이야기.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울림 있는 단문의 우화다. 2위는 루리의 동화 ‘긴긴밤’. 코끼리가 아기 펭귄을 만나 바다로 가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과 연대를 이야기한다. 전체 순위는 2위지만, 어린이 부문에서는 1위였다. 3위인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1982년과 2016년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시간대의 두 소녀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다.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담은 따뜻하고 서정적인 내용으로 청소년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4위를 차지한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6위를 차지한 양귀자의 ‘모순’은 한국 장편소설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강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양귀자의 ‘모순’은 이례적이다. 1998년 작으로, 요즘 표현으로 하면 역주행 베스트셀러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라는 문장처럼, 삶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롭고 현실적인 문장들이 소셜미디어에 공유되면서 요즘 젊은 세대에게 재발견됐다. 성인 부문에서는 ‘모순’이 2위였다.
또 성장소설 고전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5위를 차지했고, 일제강점기의 서정과 저항 의식을 담아낸 윤동주 시인의 대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9위였다. 10위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이현의 창작 동화 ‘푸른 사자 와니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