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호서 연합군에 항복하는 日 육군대장 -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육군을 대표해 우메즈 요시지로 대장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트럼프 대통령처럼 타국(他國) 돈을 단기간에 미국으로 많이 끌어온 미국 대통령은 역사에 없다. 한국·일본·EU에서 끌어들인 직접 투자만 1조5000억달러다. 여기에 미국산 에너지 구매 약속을 더하면 2조달러를 훌쩍 뛰어넘는다. 말이 좋아 ‘투자’지 남의 지갑을 뒤져 강제로 돈을 꺼내간 거나 마찬가지다.

한국 대표단은 골프 여행 떠난 트럼프 일행을 대서양 건너 스코틀랜드까지 쫓아가며 온갖 공(功)을 들였다. 트럼프를 설득하는 이재명 대통령의 모습과 환한 얼굴로 한국 대표단 모두와 기념 촬영을 하는 트럼프 사진에 조마조마하던 국민도 한시름 놓았다. ‘굳이 합의문을 작성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된 회담’이라고 했다.

미국과 무역에서 압도적 흑자를 내는 나라는 중국이다. 작년 흑자액이 2954억달러다. 트럼프는 그런 중국은 놔두고 한국·일본·EU 팔을 먼저 비틀었다. EU는 27국으로 구성됐다. EU는 작년 2365억달러 흑자를 냈고, 이번에 6000억달러를 직접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과 일본의 흑자액은 660억달러와 685억달러로 비슷하다. 그러나 경제 체력(體力)은 다르다. 외환 보유액은 한국의 3배고, 경제 규모는 한국의 2.5배 규모다.

트럼프는 어제 한국의 직접 투자액은 ‘선불(先拂)’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한국은 직접 투자 3500억달러 대부분은 대출과 보증이고 현금 투자는 소액(少額)만 하는 걸로 이해하고, 그렇게 국민들에게 설명했다. 사실 미국은 관세 협상 타결 발표 이틀 후부터 딴소리를 냈다. 국민은 한국 정부 말을 믿었다.

그러나 사태는 달리 흐르고 그걸 되돌리기에는 힘이 부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직접 나섰으나 트럼프 벽(壁)은 꼼짝 않는다. 한국 외환 보유액 4163억달러(8월 말 기준)에서 3500억달러(84%)가 미국 투자로 빠져나간다는 말에 국민들은 외환 위기의 악몽(惡夢)부터 떠올렸다. 미국은 외환 위기를 막는 방화벽(防火壁)이라는 한·미 통화 스와프(한국 화폐를 미국에 맡긴 뒤 미리 정한 환율로 달러와 맞바꿀 수 있도록 하는 협정)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더 기막힌 건 또 있다. 일본은 투자 약속액 5500억달러를 미국이 지정한 사업에 지정한 기간 내에 투자하고, 원래 투자 금액을 회수한 다음에 나는 이익은 미국이 9할, 일본이 1할 가져가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한국도 일본처럼 하라고 한다. 일본이 트럼프의 무리한 요구에 버텨주면 그걸 방패로 삼으려 했던 구상부터 빗나갔다. 이재명 대통령이 전례 없이 미국 방문 전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트럼프 요리법(料理法)을 훈수받은 게 무색하게 됐다.

한국의 구멍은 어디였을까. 역설(逆說) 같지만 미국과 전쟁을 벌였던 나라만 아는 미국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을 미국과 어깨동무만 해온 나라는 모른다. 독일은 프랑스보다 미국을 헛짚는 경우가 드물다. 미국 속생각을 들여다보려고 일본처럼 애를 끓이는 나라도 없다.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에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됐다. 미국은 1985년 엔(円)화 가치를 두 배로 올려 일본 수출의 허리를 부러뜨렸고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을 몰락시켰다. 독일과 일본에서 ‘반미자주(反美自主)’ 시위는 구경하기 어렵다. 한국은 미국의 한쪽 얼굴밖에 모른다. 한국이 모르는 미국 얼굴을 연구해야 한다.

트럼프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이제 비밀도 아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트럼프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건 헛수고다. 공개 연설 때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주고 설득은 공개되지 않은 자리에서 시도한다. EU는 이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편만 들던 트럼프를 돌려 놓았다. EU 대통령 격(格)인 집행위원장은 독일 정치인이다.

트럼프 장관들은 트럼프를 추앙(推仰)하는 사람들이지 트럼프 생각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대통령이 천금(千金) 같은 시간을 쪼개 트럼프 재무 장관을 설득하려던 노력은 그래서 결실(結實)이 없었다.

대통령이 실용(實用)주의를 선언했음에도 트럼프 외곽 세력 일부는 주체사상 전공자가 한국 최고 정보기관 책임자로 앉아 있는 걸 꺼림칙하게 여기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앞뒤 재지 않고 주한 미군 영내(營內)까지 쳐들어간 내란 특검은 그런 그들에게 찾던 먹잇감을 던져줬을지도 모른다.

무슨 특별한 뜻을 담으려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재명 대통령이 방미 직전 페이스북에 ‘외국 군대가 없으면 자주국방이 안 된다는 것은 굴종적(屈從的) 사고’라는 글을 올린 것은 또 어땠을까. 이제 관세 문제는 장관들 문제가 아니라 한·미 대통령 간의 문제가 됐다. 대통령 어깨가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