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로비 회사의 대표급 인사가 얼마 전 한국에 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을 움직이려면 퓰너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배넌을 만나야 한다.” 1기 트럼프 행정부 출신인 이 인사는 지금 백악관 사정에도 밝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언급한 퓰너는 미 보수주의를 상징하는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을 공동 창립하고 37년간 공화당에 정책 조언을 했던 고(故) 에드윈 퓰너를 말한다. 헤리티지 같은 정책 그룹을 통해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에게 한국 입장이 전달되도록 하는 ‘전통’ 방식은 지금 트럼프에겐 효과가 없다는 얘기였다.

스티브 배넌은 퓰너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물이다. 미 극우 정치의 전략가로, ‘워룸’이란 정치 팟캐스트를 운영하면서 매일같이 선동을 쏟아낸다. 팩트(fact)가 아닌 주장으로 극단적 반(反)이민 정서를 조성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한때 트럼프와 소원했지만 이젠 정치 시스템 바깥에서 트럼프의 ‘매가(MAGA)’ 운동을 지원한다.

배넌류(類)의 무기는 ‘음모론’이다. 자극과 더 강한 자극을 반복해 ‘가짜 뉴스’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든다. 인공지능(AI) 알고리즘과 결합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합리적 설명을 외면하는 확증 편향을 강화했다. 선후 관계는 불확실하지만 미국인의 특성도 변했다. 터치스크린 세대인 20대가 트럼프 등장 이후 남성을 중심으로 공화당 지지로 대거 이동했다는 분석이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학이나 싱크탱크의 전문가 그룹들의 발언권이 쪼그라든 지는 이미 오래됐다. 좌우(左右) 사이에 작동했던 균형추가 사라졌다.

여권(與圈)을 보면, 더불어민주당 외곽에 포진한 ‘정치 유튜버’의 힘이 의원보다 세다. 이들이 먼저 강성 지지층 입맛에 맞는 의제를 설정한다. 이슈 확산력에선 여느 정치인보다 우위이고, 팬덤도 갖고 있다. 이들의 콘텐츠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과 결합해 빠르게 확산한다. 강성 지지층 요구가 반영된 강경론 일색이다.

한 주간지의 분석에 따르면, 작년 9월부터 1년간 김어준씨 유튜브 방송과 전화 인터뷰를 하거나 직접 출연한 민주당 국회의원은 119명이다. 다른 유튜브 방송까지 합하면 여당 의원의 ‘유튜브 편중’은 더 심할 것이다.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면 후원금도 금방 채워진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 개인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국내 정치인으로선 처음으로 100만명을 돌파해 골드버튼을 받았다. 앞서 김어준씨 방송에 출연한 것이 구독자 증가에 도움이 됐을 거라고 한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이번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서도 보수 유튜버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배신’ 같은 자극적 언어를 반복해 극단적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가짜 뉴스’와 선동이 난무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국민의힘 당원 구성도 이전과 달라졌다는 게 중론이다. 이준석 축출, 친윤의 패권적 당 운영, 계엄·탄핵 사태가 이어지면서 중도 성향은 빠져나가고 강경 우파 성향 당원들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이다.

정치와 미디어의 역할은 ‘통합’이지만, 뉴미디어 시대로 접어들면 들수록 정치·사회적 분열은 심해지고 그 틈은 더 벌어졌다. 학자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퇴행’이라고 진단한다. AI 시대가 본격화되는 것을 놓고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상황’이 출현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민주주의 미래가 달렸다. 하지만 지금 여야는 오히려 ‘퇴행적 상황’에 영합하려는 정치인들이 주도하고 있어 기대를 갖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