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온 미래–정청래·조국·장동혁’이란 제목으로 원고지를 몇 장 메워 나가는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셋 다 유튜브 중독자가 아닌가. 이런 글을 그들이 읽겠는가. 이 세 인물 이야기를 쓰려면 많든 적든 김어준과 전한길에 대한 언급을 비껴갈 수 없다. 누가 주연(主演)이고 누가 조연(助演)인지 분간 안 되는 이 다섯을 무대에 올리니 대한민국의 장래가 암울(暗鬱)했다. 더 이상 펜이 나가지 않았다.
그래 트럼프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지난 한 달 사이 트럼프는 한국에서 5000억달러(이 중 1500억달러는 한국 기업 직접 투자), 일본에서 5500억달러, EU에서 6000억달러의 투자 약속을 받아 냈다. 팔이 비틀려 투자 약속을 토해 내면서도 세 지도자는 연신 트럼프를 추어올렸다. 변신(變身)의 방향과 각도를 재면 이재명 대통령이 단연 돋보였다. ‘힘이 곧 법(法)’인 세계에서 아첨과 아부도 국가 생존술이다.
이 장면을 보고 어느 프랑스인 얼굴이 떠올랐다. 헨리 키신저는 닉슨과 포드 대통령 시절,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카터 대통령 시절 백악관 안보 보좌관을 지냈다. 두 사람이 다 같이 ‘존경하는 유럽인’이라고 불렀던 이 프랑스인은 자신의 책 ‘제국적(帝國的)공화국(Imperial Republic)’에서 미국의 미래를 이렇게 내다봤다.
“세계 질서는 ‘힘의 질서’이자 ‘법(法)의 질서’다. 미국이 두 질서 모두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결국 미국의 국익은 손상되고 어떤 동맹국도 포용하지 못하고 어떤 국가의 충성심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강대국의 영향력은 이상(理想)을 향한 추구를 멈추는 순간 쇠퇴하기 시작한다." 한국이 트럼프 태풍의 진로(進路)를 바꾸지는 못한다. 어찌 됐든 돛대가 부러져선 안 된다. 그러려면 국가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
국가 실력을 기르려면 국민 실력을 길러야 한다. 로봇 숫자가 아니라 로봇을 설계하는 사람 숫자가 곧 그 나라 실력이다. 작고한 이건희 삼성 회장은 ‘사람 자원(資源)’에 대해 두고두고 되씹을 만한 말을 여럿 남겼다.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2003년), “핵심 인재를 몇 명이나 뽑았고, 이를 뽑기 위해 사장이 얼마나 챙겼으며, 확보한 인재를 성장시키는 데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사장 평가 항목에 반영하자”(2002년).... 들리는 소리대로 삼성이 예전 같지 않다면 이 선대(先代)의 유훈(遺訓)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국가의 성쇠(盛衰)에서도 인간 자원이 결정적이다. 1933년까지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는 영국과 미국을 합한 숫자보다 많았다. 나치가 집권하면서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독일은 20세기 말까지 옛 영화를 되찾지 못했다.
한국의 미래가 불안한 것도 같은 이유다. 2024년 태어난 각국 신생아 숫자는 인도 2300만명, 중국 950만명, 미국 360만명, 일본 72만명, 독일 67만명, 프랑스 66만명, 영국 59만명, 한국 23만명이다. 인구의 크기가 비교가 안 되는데 이들과 겨뤄 버텨내려면 인구의 질(質)이 높아야 한다.
인구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교육 시스템(교사 수준·교육 방식·학생 선발 방법·교육에 대한 국가와 기업 지원)이다. AI 시대 교사를 주판 놓던 시대 방식으로는 길러내지 못한다. 지금 대학 입시 수능은 학생의 창의성을 싹부터 잘라 사고(思考) 능력을 짓밟는 제도다. 초·중·고 학생 교육비보다 못한 게 대학 교육비다. 중국 출생아의 40분의 1밖에 안 되는 수준으로는 로봇 아니고선 공장을 돌릴 수 없다. 휴전선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대학과 기업 연구소 인력은 우리가 길러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한국은 발명하고 설계하는 능력을 잃고 조립(組立) 라인이나 지키는 ‘하청(下請) 국가’로 퇴보하게 된다.
천재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지금 세계를 흔드는 AI 기술의 아버지가 폰 노이만(1903~1957)이다. 컴퓨터에서 게임 이론까지 현대를 상징하는 과학과 발명에는 대부분 그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천재 한 명이 전 세계 연구소에서 10만명을 연구원으로 부리고 1억명을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1929년 1월 18일 비트겐슈타인(1889~1951)을 만나고 ‘방금 신(神)이 도착했어. 오후 5시 15분에’라는 엽서를 아내에게 보냈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논리학·철학의 천재로 꼽히는 인물이다. 천재가 천재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하늘이 낳는 천재를 교육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교육 혁명으로 평범한 싹을 수재(秀才) 가까운 존재로 키울 수는 있다. 중국의 인해전술을 당해낼 길은 이 길 말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