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휴전은 결국 우크라이나 국토의 분할이나 할양 방식으로 가고 있다. 엊그제 미국의 트럼프와 러시아의 푸틴이 알래스카에서 정상회담을 했지만 논의된 것은 돈바스라는 우크라이나의 알짜배기 땅 떼어주는 문제였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 협상의 어디에도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의 목소리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지원 없이는 단 며칠을 버틸 수 없는 우크라이나에는 발언권이 없었다. 간밤에 워싱턴에서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만나 미·러 회담의 내용을 설명했겠지만 그것은 통보였지 협상이 아니었다. 1953년 판문점에서 6·25 휴전협정이 논의됐을 때도 한국은 협상장에 없었다. 이승만이 협상 참여를 거부한 이유도 있었지만 미국 입장에서 한국의 ‘양보 없는 목소리’는 협상의 걸림돌일 수 있었다. 한국의 참여 없이 휴전선은 그어졌다.

한국이 여기서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처럼 미국이나 서방(나토)의 지원 없이는 전쟁마저 수행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연코 전쟁을 혐오한다. 6·25를 겪은 우리는 전쟁의 참상 앞에 다시는 우리 부모 형제 자식을 내몰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록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라 할지라도 전쟁이라는 방식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공통분모가 우리에게는 형성돼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전쟁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의 평화 염원을 착각한 세력이 전쟁을 걸어올 때 우리는 전쟁에서 도망갈 수 없다. 우리가 무력을 장착하고 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것은 그때 맞서 싸울 때를 위해서다.

그래서 우리는 군대 숫자도 유지해야 하고 무기도 개량하고 확보해야 하며 또 훈련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핵무기 보유를 거론하는 이유도 우리를 넘보는 자들이 없길 바라서다. 훈련도 그렇다. 우리가 녹슬지 않으려고 하는 훈련이지 남을 공격하려는 무장이 아니다. 그렇게 절체절명한 일을 북(北)쪽의 누군가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지레 알아서 줄이고 없애고 손 터는 그런 체제라면 우리가 어찌 자주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은 엿새 뒤인 25일 미국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 이 만남은 그 시점에서 볼 때 우리의 역대 어느 대통령이 미국의 역대 어느 대통령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그냥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트럼프라는, 미국 정치사상 희귀한 지극히 미국적이고, 어찌 보면 제국주의적인 극우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금 전 세계를 관세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반(反)트럼프를 조금도 견뎌내지 못하는 독불장군이자 미국 MAGA(미국제일주의)의 수령이다. 한국 대통령도 어느 누구보다 ‘평화’를 외치고, ‘자주’를 말하며 어느 누구보다 ‘전쟁 혐오’를 외치며 열기가 달아올라 있다. 관세 문제는 이미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황에서 정상회담이 무엇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인지 그것이 우선 궁금하다.

나는 미국 MAGA 세력들의 좌장(座長)처럼 행세하며 개인적으로도 트럼프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강경 보수 인플루언서 로라 루우머라는 여성이 지난 6월 한국의 대선 결과를 ‘끔찍한 일’이라고 평가하고 “Rest in Peace KOREA” “한국은 잘 쉬어라”라고 악담한 것을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는 좋게 보면 저돌적이고 나쁘게 보면 거만하고 무례한 인상을 준다. 지난 1월 백악관에서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를 만났을 때 그가 보인 태도는 ‘삼전도의 굴욕’을 연상시키고도 남는다. 그가 이 대통령을 만날 때 한국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를 어떻게 대우할지, 그 결과에 따라 이 대통령이 어떻게 처신할지, 그리고 그의 지지 세력이 대북 관계, 주한 미군, 한미 동맹의 전개에 어떻게 반응할지 그것이 주목된다. 그것이 반미 세력의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기상 이 대통령의 5년은 트럼프의 4년과 같이 가게 돼 있다. 한국의 앞으로 5년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트럼프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새 정부가 권력 교체에 따른 온갖 정치적 이득을 취하고 또 여당이 반미 운동 경력자를 당대표로 선출하는 등 보란 듯이 가는 것은 그렇다 치자. 다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5000만 국민을 지키는 일은 결코 권력적 도취감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다. 경제는 고칠 수 있고 다시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안보는 한번 길을 잘못 들면 되돌아 나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