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엘리트 정치인 몇 명이 ‘반(反)극우 연대’를 결성했다. 그중 한 명은 “국힘의 극우화는 국힘의 자살, 보수의 자살, 대한민국의 자살”이라고 했다.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셈법이 있겠지만 이들이 제시한 문제는 본질적이다. 보수당과 극우, 정확하게 정의하면 보수주의와 우파 포퓰리즘의 관계는 지금 선진국 보수 정당이 안고 있는 공통 문제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전통과 질서에 대한 존중’이다. 여기서 일탈해 전통 대신 반동, 질서 대신 폭력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극우라고 한다. 서부지법 폭력, ‘윤 어게인’ 구호 등 몇몇 행태는 극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행태는 비판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이 세력의 일부라는 점, 보다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정치적 실체가 이들의 본질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작년 말 계엄은 당혹스러웠다. 그만큼 당혹스러웠던 현상이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 급성장한 탄핵 반대 시위였다. 몰랐던 힘이 갑자기 폭발한 것이다. 2월 8일 대구 집회는 좌우를 통틀어 계엄 이후 최대 규모로 커졌다. 내 주위에도 “대구로 간다”는 사람이 있었다. 공대 석좌교수, 개척교회 집사, 백수 친구까지. 그들은 극우가 아니다. 도대체 이 열기는 무엇인가. 언론은 이 현상을 어떻게 다뤄야 하나.
현장에서 참여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혐오, 민주당의 줄탄핵에 대한 반감, 사냥개처럼 달려든 경쟁적 수사와 절차적 불의에 대한 역겨움을 그들은 말했다. 참여자는 다양했다. 기득권자로 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사회 변화를 따라잡는 데 허덕이는 소외된 노년, 부모 세대의 이익 독점과 강남 좌파의 위선을 증오하는 2030, 동성애 같은 현상을 문명적 타락으로 보는 기독교 보수주의자, 거대 괴물로 커진 이웃 중국을 혐오하는 체험적·이념적 반중 세력 등. 기존 계급 인식의 틀에 맞춘 좌우 논리로는 이 현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국힘 엘리트 다수는 초반 열기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감지했어도 무시했을 것이다. 그들이 혐오하는 호전적 유튜버와 열성적 신봉자들이 무덤에서 퍼 올린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보는 듯하다. ‘탄핵 심판 직후 반대 시위는 거품처럼 부서졌다. 한 줌 정치 세력만 남았다. 그들을 털어내면 중도를 끌어들일 수 있다.’ 명쾌한 논리지만 간단치 않다.
보수라면 이런 세상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 트럼프가 하는 정책이 우파 포퓰리즘이다. 트럼프 재집권은 ‘백인의 미친 짓’인가. 트럼프만 사라지면 세상도 ‘정상’으로 돌아갈까. 사실 미국 보수주의와 우파 포퓰리즘의 연대는 트럼프 훨씬 이전인 1970년대 후반 시작됐다. 한국의 보수 엘리트가 칭송하는 헤리티지재단이 주도했다. 여기서 발간하는 보수의 지침서 ‘리더십 지침’ 서문은 전 모씨가 읽으면 당장 “극우” 소리를 들을 내용이다. 우파 포퓰리즘의 호전성을 그대로 드러낸, 자유 투사의 출사표 같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베의 정권 탈환과 8년에 걸친 장기 집권도 자민당 보수주의에 젊은 우파 포퓰리즘을 흡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난 선거에서 극우 정당의 약진은 아베 이후 리더십의 붕괴에서 일어난 일이다. 보수와 우파 포퓰리즘이 분화했고, 자민당엔 참패만 남았다. 이런 방식이 정의인지, 불의인지는 다음 문제다. 미·일 보수는 그렇게 생존했고, 진화했고,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파 포퓰리즘은 죽지 않는다. 사회 분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미국 제조업과 함께 붕괴한 애팔래치아 중산층, 기득권 부모 세대와 철저하게 단절된 일본 2030의 하류 사회. 미·일 보수당은 이들의 열등감과 상실감을 달랬다. 52시간, 주 4.5일 근무, 정년 재연장. 한국은 정부와 노조의 공동 지원 아래 대기업 정규직 12%의 천국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머지는 애팔래치아 하류 사회의 방치된 처지와 비슷하다. 내가 국힘 엘리트라면 반극우가 아니라, 한국 사회 88% 언더독의 보수화에 사활을 걸 것이다. 미·일 보수가 지지층을 넓힌 방법이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포퓰리즘 아웃사이더 정치인이 부정선거 괴담, 광우병 선동 세력, 과거 주체사상 신봉자, 부동산 투기꾼, 빅테크와 재벌, 한때 ‘극우’ 소리 듣던 논객까지 엮어 사상 최강의 권력을 창출했다. 전과도, 갑질도 상관없다. 이런 정권의 지지율이 60%다. 서울법대, 서울의대 출신의 엘리트들은 이런 정치를 끝장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보다 먼저 망한 것이 그들이 신봉하는 순결한 엘리트 보수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