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총선 몇 달 전, 민주노동당 관계자로부터 박찬욱, 봉준호가 자기 당 강남갑과 금천 당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으로 최고 흥행을 했던 두 감독 이야기를 해주면 기자가 놀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속으로 “그 사람들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계로 들어간 ‘한때 운동권’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총선 일주일을 앞두고 나온 영화인들의 민노당 지지 선언에는 박찬욱, 봉준호 외에 감독 변영주, 임상수, 류승완과 배우 문소리, 오지혜 등 226명이 참여했다.
이들의 지지 선언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1991년 사회주의가 몰락했고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혁명과 운동권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가수 정태춘은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에서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말라, 우리들의 한 시대가 흘러간다”고 했다. 이 시기에 운동권 인사들이 문화계에 대거 진출했다. 1992년 ‘노찾사’ 노래 공연에 서울대 총연극회 출신인 배우 정진영과 김의성이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운동장은 김문수, 노회찬, 심상정 같은 노동 현장이 아니라 영화나 음악 같은 문화였다. 현대의 변혁 운동은 정치가 아닌 문화가 주도할 것이라는 신념 속에 그 분야에 터를 잡고 ‘진지전(War Of Position)’에 나선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그람시가 제시한 ‘진지전’은 마르크스, 레닌의 단기 혁명이 아닌 장기 혁명 전략이다. 폭력이 아닌 동의(同意)에 의한 권력을 뜻하는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문화 전쟁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군대와 경찰 같은 ‘억압적 국가 기구’가 아닌 문화, 대학, 종교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를 주목했다.
문화와 대학, 그리고 법조계에 왜 진보·좌파가 많고 이들이 우위를 점했는지를 알려면 이런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법연구회, 민변, 전교조, 민교협 같은 단체 이름만 안다면 그 깊은 역사와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때 장기전을 시작했던 이들이 20년, 30년이 지나 해당 분야의 주류(主流)가 됐다. 물론 이들 다수는 시간과 함께 혁명과 멀어졌지만 한 시절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작년 말 비상계엄은 이들의 가슴속 버튼을 눌렀다. 이란에 숨겨놨던 이스라엘 드론처럼 비상계엄이 버튼을 건드리자 법원, 검찰, 대학과 문화계 곳곳의 진지에서 일제히 드론들이 날아올랐다.
미국의 보수파들도 대학이나 문화계 같은 ‘문화 전쟁’에서 좌파에 패배한 이유를 분석했고 그렇게 찾아내 연구한 것이 공산주의자 그람시였다. 좌파의 ‘진지’를 파괴해 되찾아 오자는 것이다. 트럼프가 하버드 예산을 삭감한 것은 시작일 뿐 다음 타깃은 할리우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권력은 폭력이 아닌 동의에 의해 장악된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말로는 문화 전쟁이라면서 그 방식은 비문화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런 전쟁은 이길 수 없다.
한국의 보수는 왜 박찬욱, 봉준호가 없느냐고 한숨만 쉴 때가 아니다. 자발적 동의에 의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선 실력을 쌓고 장기 플랜을 세워야 한다. 박찬욱, 봉준호의 시대도 이젠 하강 곡선이다. 그다음은 준비하는 자들의 몫이다. 그람시는 100년 전 감옥에서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세계는 태어나지 않았다”며 권력 공백기 (interregnum)를 위기로 규정했다. 보수도 진보도 구질서는 무너졌지만 새 질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 4050세대는 민주당에 70% 가까운 지지를 보냈다. 진보는 안정적 궤도에 진입한 것처럼 보이는 반면, 보수는 2030과 고령층으로 양극화됐다. 그러나 이런 어수선한 전환기가 보수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잃을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과감한 변화가 가능하다. 당장 다음 지방선거, 총선에 꼼수로 뒤집을 생각을 접고 20년 앞을 내다보고 세대교체를 하고 보수의 사상도 혁신해야 한다.
2030 문화 전사들은 과거 박찬욱, 봉준호가 기성세대에게 ‘빨갱이’ 비난을 들으며 미래를 준비한 것처럼, 지금 4050들에게 ‘극우’ ‘혐오’ 같은 공격을 받으면서도 발랄하게 곳곳에 진지를 틀고 있다. 2030 중심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기성세대는 양보하고 응원한다면 보수에도 박찬욱, 봉준호를 능가하는 자산이 곧 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