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이 작년 12월 4일 새벽 국회 본관 정문 앞에서 국회 사무처 직원, 보좌진 등과 대치하고 있다. 계엄군은 정문이 막히자 사무실 유리창을 깨고 건물에 진입했지만, 의원들이 계엄 해제 요구안 표결을 위해 모인 본회의장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김지호기자

의사 박은식(41)은 병원에 사표를 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자신의 고향이자 지난 총선 때 국민의힘으로 출마해 8.6%를 득표했던 광주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의사라 다르다지만 총선 후 일자리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서울 강북의 한 병원은 정치 성향을 문제 삼아 퇴짜를 놨고, 경기도에서 봉직의(페이닥터) 자리를 구했다. 그는 “계엄에 동의할 수 없어, 탄핵 반대 집회에도 나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면 안 되는 대선입니다. 계엄을 제가 사과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민주당 폭주도 심판해 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을 왜 박은식이 대신 사과해야 하는지 설명할 도리가 없다.

수방사 제1경비단장 조성현 대령은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 지시한 적 없다는 윤 전 대통령 주장을 반박해 왔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서 “조 대령이 국회로 이동 중이던 부대에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적시했다. 그는 재판에서 “군에 명령은 목숨 바쳐 지켜야 할 가치지만, 반드시 정당하고 합법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군은 조 대령처럼 명령이 정당한지 부당한지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짐을 지게 됐다. 국회에 투입됐던 707 특임단원들은 “실전이었으면 우린 다 죽었다”고 말했다. 참수 부대로도 불리는 최정예 부대가 국회 구조도 모른 채 투입됐다. 작전 지역이 국회가 아닌 적진이었다면 어쩔 뻔했나. 계엄이 경고용이라는 윤 전 대통령 주장에 “군이 한번 쓰고 마는 수단이냐”는 항변은 그래서 타당하다. 아직 누구도 우리 군의 짓밟힌 자존심에 고개 숙여 사과하지 않았다.

50대 직장인 최모씨는 투표권이 생긴 이후 주로 민주당 계열에 투표해 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보면서 지난 대선 때 처음으로 보수 후보에게 투표했다. 그러나 그는 계엄의 밤에 윤석열에게 투표한 자신을 원망했다고 한다. 계엄을 명령한 건 윤 전 대통령이었는데 왜 부끄러움은 자기 몫인지 지금도 괴롭다고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윤 전 대통령 말과 달리 계엄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 많은 일이 나라에 일어났다. 조기 대선에 들어가는 4949억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계엄 이후 자영업자들이 본 피해는 가늠하기 어렵다. 통상 전쟁 와중에 리더십 부재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지금 계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계엄이 해제된 아침, 전직 외교관에게 “우리 회복력을 보여준 건 다행”이라고 했더니 그는 “그건 우리 생각일 뿐이다. 이미 한국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고 말했다. 한국 같은 경제 규모를 가진 멀쩡한 국가 중에 경고용 계엄을 선포하는 나라는 없다. 그걸 윤 전 대통령이 했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선거법 파기환송에도 민주당 폭주는 멈추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며 당연히 나왔을 법한 후보 교체론도 없다. 선거 상대가 우습고 만만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윤석열 정부 장관이었고, 한덕수 후보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내란 세력”이라는 이름표만 여기저기 붙이면 대선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과 여유가 있다. 대선에서 1표라도 앞서면 그다음 날부터 입법 권력에 대통령 권력을 더해 사법부를 길들이면 된다는 생각이다. 말조차 생소한 내란 특별재판소, 이건 협박용이 아니다.

보수 후보들은 두 어깨에 계엄이라는 무거운 바위를 지고 대선 출발선에 서 있다. 응원석에는 친윤들이 얼굴에 묻은 오물을 씻지도 않은 채 앉아 있다. 정상적 사고라면 대통령 파면 이후 정계 은퇴나 총선 불출마로 속죄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출발 총성이 울려도 선수들이 제대로 뛸 수가 없다. 심판에게 레드카드를 받은 이재명 후보는 “최종 판단은 관중들이 한다”며 저만치 앞서 뛰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이, 그리고 김문수·한덕수 후보가 계엄에 대해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친윤들이 무대 뒤로 퇴장해야 한다. 단일화 명분은 계엄의 강을 건너겠다는 약속이어야 한다. 왜 윤희숙과 박은식이 사과하고, 윤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국민이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계엄을 사과해야 진짜 대선이 시작될 수 있다. 그러면 운동장 밖으로 나간 한동훈, 홍준표, 안철수도 ‘원팀’이 될 수 있고 이준석도 함께할 이유가 생긴다. 무엇보다 대선 때 윤석열에게 투표한 1639만4815명도 가슴속 묵직한 돌덩이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투표장에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