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종 교수, 아니 국군대전병원장을 좋아한다. 글 잘 쓰는 의사를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임을 알면서도 몸으로 부딪친 현장 인생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늘어날수록 병원엔 손해고, 말로는 필수 의료 운운하지만 정부 예산 박절했던 중증외상. 부조리 속에서도 매일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렸다는 점에서, 입으로만 정의 외치는 사람들과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최근 그의 ‘탈조선’ 발언이 논란이 됐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조선에는 가망이 없다”는 내용이었는데, 요즘 한국 사회를 긴장시키는 소위 ‘피크 코리아’ 논란과 포개지면서 확산됐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군대 강연의 일부였고, 대중이 아니라 군의관이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대 다양한 직군에서, 요즘 말로 ‘긁힌’ 것 같다. “정점 찍었다, 한국은 여기까지인가”를 묻는 세태 때문일 것이다.
돈도 인재도 공장도 한국을 떠난다. 미국 증시에 투자하는 돈이 1000억달러를 돌파했고, 똘똘한 공대생도 미국으로 가며, SK하이닉스·현대차도 미국에 새 공장을 짓는다. 이뿐인가. 출생률 세계 최저,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도 마이너스. 믿었던 K팝·K콘텐츠도 사면초가다.
맞는 우려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 터널 밖을 한번 보자. 우리만 그런가. 돈·인재·공장의 자국 탈출은 OECD 국가 대부분의 현상. 우리가 최악이긴 하지만, 1 이하 출생률 역시 선진국 모두의 한결같은 공포다. 천조국이라 불리며 돈과 재능이 몰리던 미국도 마찬가지. 트럼프가 쏘아 올린 패러다임 대격변으로 그 나라도 아수라장이다. 미국 증시로 집중되던 돈은 유럽·중국·신흥국으로 분산됐고, 아직 최종 숫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올해 1분기 역시 0%대 초반 아니면 마이너스 경제성장률로 예측되고 있다.
10년 전 화제가 됐던 소설가 장강명의 장편 ‘한국이 싫어서’를 기억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은 잠수함의 토끼. 역설과 반어로 다가올 위험을 경고한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났던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와 달리, 지금의 젊은 세대는 태어나 보니 선진국이었다. 결핍 모르고 자란 세대에게 ‘피크 코리아’와 ‘내리막 세상’은 경험하지 못했던 좌절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인용하고 싶은 동세대 일본의 다른 책이 있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지만, 비슷한 시기 젊은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젊은이들’이다. ‘잃어버린 30년’, 그때는 일본도 그랬다. 취업률도 바닥이고, 결혼도 힘들며, 고령화로 청년 부담도 갈수록 커지는데 왜 젊은이들은 행복하다 말하는가. 비결은 소박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기 만족적 삶’이었다.
두 책이 각각 자기 나라에서 관심을 끌었을 당시, 장강명이 노리토시에게 물었다. 만약 일본 소설가가 ‘일본이 싫어서’라는 책을 쓴다면 반응이 어떨 것 같냐고. 사회학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공감받지 못할 우려가 있다. 대다수 일본 젊은이들은 ‘일본을 버려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일본에 태어나서 좋다’고 대답한 젊은이들이 100%에 육박한다는 대답도 있다.”
소박한 행복에 안주하는 ‘자기만족적 삶’이 정신 승리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냉소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은 없는 법. ‘피크 코리아’의 결론이 탈조선이라면, 누구 말마따나 우리는 이미 일제강점기, 6·25, IMF 사태 때 한국을 떠났어야 하지 않겠나.
격변하는 세계에서 지금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시 판을 짜야할 때. 이제는 선배 세대처럼 오르막 세상이 아닌 ‘내리막 세상’이 왔음을 받아들이고, ‘수축 사회’에서 사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결핍없는 세대와 헝그리정신 세대가 교집합부터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