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다시 조용해졌다. 배우 김새론이 스물다섯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보름. 며칠 동안은 우리가 너무했다, 악플이 범인이다, 악성 유튜버와 황색 언론 책임이다 등등 질타가 이어지더니 다시 잠잠하다. 늘 그런 식이다.
‘죽어야 멈추는 손’이라며 악플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그리고 대응책으로 법적 처벌과 소위 ‘금융 치료’를 거론한다. 옳은 말이다. 당연히 처벌도 강화해야 하고 배상금도 물려야 한다. 하지만 이 ‘못된 손’의 장막 뒤에는 숨은 빅 브러더가 있다고 생각한다. 빅테크의 알고리즘. 분노와 혐오 비즈니스로 유튜버와 연예 매체를 자발적 불나방으로 변신시키는 진짜 범인 말이다.
현대 동남아 사회에서 최대 2만5000명이 살해당하고 6만명이 강간당했으며, 73만명이 추방당한 민족 청소 사건이 있었다. 불교 나라 미얀마의 이슬람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이야기다. 2018년 당시 페이스북의 저커버그가 미 상원 청문회에 참석해 책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알고리즘이 이 비극을 낳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플랫폼을 보유한 빅테크 알고리즘의 제1 원칙은 ‘사용자 참여의 극대화’다. 단순히 많은 시간뿐만이 아니다. ‘좋아요’ 누른 횟수, 게시물의 공유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이유는 명백하다. 점유율 확대와 그 결과인 광고 수익 극대화. 인터넷 사용을 위한 심카드 가격이 2달러 수준으로 내리며 인구 5000만명의 미얀마에서 페이스북 사용자는 1800만으로 폭증했다. 당시 이 나라에선 페이스북이 곧 언론. 페이스북은 2016년 ‘인스턴트 아티클’ 제도를 도입했다. 한마디로 조회 수와 클릭 수 비례로 제작자를 보상하는 시스템이다. 결과는? 직전까지 미얀마 온라인 뉴스 사이트 상위 10곳 중 6개가 합법적 정론지였던 데 반해, 2년 뒤엔 톱텐 모두 가짜 뉴스 범벅의 낚시성 매체로 도배됐다.
유감이지만 우리는 두 얼굴을 가진 존재. 익명에 숨을 수 있다면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보다 충동과 감성을 우선하는 변연계의 노예가 된다. 군부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 바람이 분 미얀마에서 정파와 종교마다 작은 충돌이 시작됐을 때, 페이스북은 미얀마 국민들의 전두엽보다 변연계를 연결했다. 이슬람 교도들을 품어준 착한 스님의 미담은 뉴스피드에서 안 보이는 곳으로 밀렸고, 폭력·살인·민족 청소를 부르짖는 과격파의 동영상만 무한 공유됐다. 그 결과가 앞에서 언급한 끔찍한 숫자들이다.
메타의 저커버그나 네이버의 이해진은 억울할지 모르겠다. 로힝야족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수 있고, 영화 ‘아저씨’의 꼬마가 성인이 됐는지도 몰랐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용자 참여의 극대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빅테크 알고리즘의 제1 원칙. 종이신문 등 소위 레거시 미디어가 이 배우의 사생활을 아예 다루지 않거나 품위를 포기하지 않을 때, 수익 창출을 꿈꾸는 유튜버와 인터넷 매체는 ‘음주 운전 자숙 중 술 파티’ ‘셀프 연애론 소름 돋는 행태’ 등의 혐오 콘텐츠를 양산해냈다.
소셜미디어와 빅테크 플랫폼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더 적극적인 자정 장치와 수정된 알고리즘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금 유튜브와 X와 페이스북과 틱톡은 “진실을 장려하기보다는, 거짓과 허구에 보상해주는 오류 증폭 장치(유발 하라리의 ‘넥서스’)에 가깝다.
좋아하는 일화로 다섯 살 소년과 아빠의 게임 에피소드가 있다. 게임에서 진 아이의 컴퓨터 화면에 ‘fail’이라는 창이 떴다. 과연 영어를 알까 싶어 궁금해진 아빠가 묻는다. “너, fail이 무슨 뜻인지 알아?” 해맑게 웃는 소년의 대답. “응 아빠, 다시 하라는 뜻이야.”
실패가 아니라 다시 하라. 한 번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 재기(再起)가 가능하도록 ‘악마의 알고리즘’을 바꿔야 한다. 공룡이 자기 목에 방울을 달 수는 없는 법. 법과 정치가 계속 압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