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자료 이면에 숨은 행간의 의미를 찾는 일은 기자 업무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지난달 서울시향 신임 대표 취임 회견장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료 첫 장의 최상단에 ‘10년 뒤 서울시향의 경쟁 상대는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으니까. 사실상 “이렇게 써달라”는 강력한 주문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2015년 지휘자 정명훈 사임(辭任) 이후 오랜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서울시향이 재도약의 호기를 맞은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해 뉴욕 필하모닉 출신 거장 야프 판 즈베던을 음악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청신호가 켜졌다. 국내 악단의 경우 음악 감독의 임기는 통상적으로 2~3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 크게 임기 5년을 보장했다. 판 즈베던도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회는 물론,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기생충’의 음악 감독인 정재일의 신곡 초연까지 의욕적인 청사진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과 ‘세계 최고의 명문 악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말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국 프로야구 팀이 국내 리그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곧바로 오타니 쇼헤이의 LA 다저스와 맞붙을 만한 전력이 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서울시향 역시 세계 수준의 도약을 꿈꾼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난제가 적지 않다.
우선 현재 서울시향 연주회에는 매번 적잖은 해외 명문 악단의 전·현직 단원들이 ‘객원 연주자’로 투입되고 있다. 국내 악단의 취약점으로 꼽히는 금관을 든든하게 채워주니 당일 연주회의 수준이나 완성도는 올라간다. 하지만 장기적인 체질 개선 없이 반짝 경기 부양에만 집착하는 모양새라고 할까. 악단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반드시 돌아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현재 서울시향에 사실상 단원 정년이 없다는 점이다. 같은 서울시 산하 예술 단체인 서울시무용단·합창단·극단·뮤지컬단·국악관현악단의 정년이 만 60세인 것과도 대조적이다. 물론 여기엔 사정이 있다. 지휘자 정명훈 재임 시절에 ‘단원 정년은 없는 대신에 상시 평가를 통해서 하위 등급 5%를 재계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강력한 규정이 적용됐다. 하지만 정 감독 퇴임 이후에 이 규정은 사문화(死文化)됐다. 상시 평가라는 ‘채찍’은 사라지고 ‘무(無)정년’이라는 ‘당근’만 남은 셈이다.
문제는 한 해 210억원이 넘는 시민 혈세가 투입되는 서울시향에 정년 제도마저 없으면 ‘젊은 피 수혈’이 어려워지고 세대 간 불균형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베를린 필과 빈 필하모닉 같은 정상급 악단들이 65세 정년 규정을 두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베를린 필과 맞붙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글로벌 스탠더드’부터 갖춰야 한다. 자칫 ‘세계 정상’의 공언(公言)이 ‘사상누각’의 공언(空言)에 그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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