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계엄 사태 이후 20일이 지났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거리는 시끄럽다. 반면 경제 현장에서 뛰는 기업인들은 말문을 닫았다. 투자나 비즈니스는 취소되거나 보류되고 있다. 계엄과 탄핵 정국이 치를 경제적 비용은 상당할 것이다. 한국 경제와 기업이 제대로 평가를 못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가운데 정치 리스크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것이 세계에 생중계됐을 뿐 아니라 천운처럼 다가온 기회도 걷어찼기 때문이다.
세계 질서가 신(新)냉전 구도로 재편하고 미국 행정부가 바뀌는 긴박한 전환기를 우리는 직무 정지된 대통령으로 속수무책 흘려보내고 있다. 트럼프 2기는 전광석화처럼 정책 판을 짜고 있다. 지난 11월 초 트럼프 당선인이 윤석열 대통령과 첫 통화에서 조선업 협력을 부탁한 건 행운의 여신이 우리를 향해 미소 지은 기회였다. 세계 최고의 조선업과 원전이라는 트럼프가 필요로 하는 산업을 우리가 갖고 있다. 내년 1월 트럼프 취임 전까지 윤 대통령이 신속하게 ‘트럼프 패키지’를 마련해 제안했다면 믿음직한 파트너로 외교·안보·통상 정책에서 유리한 핫라인을 선점했을 것이다. ‘트럼프-문재인-김정은’의 쇼맨십 외교 대신, 우리 국익에 맞는 대북 정책을 설득할 기회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라던 윤 대통령은 국가 안위에 긴요한 골든 티켓을 내팽개치고 40여 년 전 유물로 박제화된 계엄을 끄집어내 어이 없는 권력 공백을 자초했다. 그것도 대한민국이 세계의 찬사를 받는 나라로 부상하면서 곧 광복 8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기 일보 직전에.
1997년 IMF 외환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10년 주기 경제 위기설이 굳어졌다. 위기는 늘 다른 얼굴로 온다. 12·3 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는 2017년부터 본격화된 세 번째 경제 위기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불통과 배우자 리스크로 지지율이 하락하다 급기야 계엄까지 시도한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판단은 개인 성향 탓이지만, 한국 경제를 짓눌러온 세 번째 위기는 꽤 오랫동안 진행된 만성 위기였다. 정치가 갈등을 ‘조정’하는 대신 ‘조장’하면서 사회를 쪼개고, 나라야 어찌되든 포퓰리즘과 딴지걸기로 내달려온 저질 정치가 경제 개혁과 구조조정을 막는데도 개선의 기미조차 안 보인다는게 경제 위기의 본질이다.
법의 극치는 불법의 극치라는 말도 있다. 저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의 저자들은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법과 제도 이전에 규범이라는 연성 가드레일이 잘 작동해야 한다고 했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 같은 연성 가드레일이 건재해야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경제도 예측 가능성을 찾는다. 하지만 지난 8년간 취약한 연성 가드레일은 더 무너졌다. 2017년 탄핵 정국으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관용과 제도적 자제 대신 복수 혈전을 펼쳤다. 두 전직 보수 대통령을 감옥 보내고 공무원과 전문가도 편 갈라 능력 대신 내 편만 발탁했다. 도덕성이 결여된 후흑들이 대거 영입됐다. 빚 겁내지 않고 포퓰리즘 정책으로 마구 돈을 풀었지만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그 와중에 보수 대통령을 감옥 보낸 검사가 일약 보수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공정과 상식이라도 되살려 달라는 염원이었다. ‘윤석열 대 이재명’ 구도의 대선은 끝나고도 내내 연장전 상태였다. 탄핵 덕에 집권해본 민주당은 야당이 되어서는 경제 살리기는 뒷전이고 정부 흔들기에만 매달렸다. ‘정치 신인’ 대통령은 막다른 고비까지 불통을 고집하다 황당한 카드를 꺼냈다. 그 바람에 자신을 뽑아준 보수층을 쪼개고 무너뜨리고, 정치를 퇴행시킨 정치인들한테는 되레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사법 리스크를 주렁주렁 단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거리 집회에 나타나 “광화문이 더 많은 빛으로, 더 밝게 빛나길 바란다”며 대통령 탄핵 촉구를 독려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첫 경제 부총리였던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이념 정책에 매달렸던 경제 실정(失政)의 장본인들인데 서로 만나 마구잡이 추경했던 것까지 업적으로 포장하며 경제 훈수를 두고 있다.
IMF 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는 고통스러워도 극복했지만 지난 8년간 퇴행을 거듭해온 정치는 경제를 옭아맨 채 나아질 기미가 안보인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위기다. 2020년부터는 잠재 성장률에 못 미치는 성장 위기가 가시화됐는데도 구조조정과 쇄신의 통로를 막고 있다. 명색이 집권해 보겠다는 거대 정당이 정국 공백을 메우고 있는 대통령 권한 대행까지 탄핵하겠다는 수준이다. 경제가 이 정도로 버티는게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