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예일대의 계량경제학자 레이 페어 교수는 순전히 경제 지표로 미국 대선 결과를 예측하는 분석 모델(페어 모델)로 유명하다. 그는 선거 후보의 개인 성향이나 인지도, 선거 전략·프레임 등 정치 요소들은 배제하고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만으로 미국 대선 결과를 분석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골수 공화당이나 민주당 지지자가 아닌 스윙 보터(swing voter·부동층)의 판단 기준이었다. 페어 교수는 스윙보터들이 ‘지금 정부에서 삶이 더 윤택해졌나’ ‘어떤 후보가 앞으로 자신을 더 잘 살게 해줄까’ 같은 경제적·현실적 고려에 따라 투표를 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다시 말해 경제성장률이 높을수록, 반대로 물가상승률은 낮을수록 집권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기반으로 1916년부터 27차례 미국 대선을 분석한 결과, 3차례를 제외하고는 선거 결과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는 현재 여론조사에서 뒤지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할 것으로 예측했다. 바이든 재임 3년간 연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5%대로 고공 비행을 했지만 다른 주요국을 압도하는 성장률이 이를 상쇄한다는 것이다. 페어 모델에 따르면 선거 직전 3분기 동안의 성장률이 투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며 물가는 보다 장기적으로 유권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요즘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RB) 의장이 언제 금리를 인하하느냐가 11월 대선의 키를 쥐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금리를 내린다는 것은 물가 인상 압력이 충분히 완화됐으며, 미 당국이 본격적으로 경기 활성화에 나선다는 의미다.
페어 모델로 지난 총선을 분석해보면 어떨까? 지난 2년간 윤석열 정부의 경제 성적표를 보면 C학점도 받기 힘들 만큼 초라하다. 경제 성장률은 2022년 4분기 마이너스 성장에 이어 작년 1·2분기에도 0%대 저성장을 이어가면서 연간 성장률이 25년 만에 일본에 뒤졌다. 또 저성장과 고물가가 지속되면서 근로자들의 실질 임금이 2012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줄어들었다. 근로자들의 임금이 물가 인상을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찔끔 오른 탓에 근로자들의 삶이 해가 갈수록 나빠졌다는 뜻이다.
서민 생활을 짓누르는 고물가도 좀처럼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작년 10월 이후 식음료(6~7%)와 채소·과일 신선식품(13~20%) 등 생활 물가가 급등한 것은 정부의 물가 관리 능력을 의심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윤 대통령이 무심코 던진 ‘대파 가격’ 발언이 선거 기간 내내 파장을 일으킨 것도 고물가 고통에 울고 싶은 국민들의 빰을 때린 격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총선 이후 한 여론 조사에서도 투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정부 여당 심판(20%)이 아닌 물가 등 민생 현안(30%)을 1순위로 꼽았다.
경제 지표는 집권당에 대한 계량 평가 점수다. 성적이 나쁜 학생의 자소서는 어떤 미사여구로 분칠을 해도 소용이 없다.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 경기 침체, 야당의 비협조 등 변명거리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그것도 실력이고 결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또 객관화된 경제 점수가 높아야 집권당에 대한 신뢰도와 주관적인 평가도 높아지고 의대 정원 증원이나 연금 개혁 같은 거창하고 논란 많은 정책 추진도 힘을 받는다. 지금은 선후(先後)가 뒤바뀐 느낌이다.
‘아버지 부시’ 고(故)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치적이 많았다. 재임 당시 공산주의 소련 붕괴 등 냉전을 종식하고 미국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다. 그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상대로 한 걸프전에서 승리했을 때는 지지율이 90%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집권 3년 차부터 중소 대부업체들이 줄파산을 하면서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고꾸라지고 실업률도 치솟았다. 그는 당연히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1992년 대선에서 애송이 빌 클린턴이 내세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구호 한 방에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