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 명칭이 도개(道開, 경북 구미)였다. 도(道)가 열린(開) 마을이라는 뜻이다. 예사롭지 않은 이름에는 그럴 만한 땅의 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신라 불교가 처음 전래된 초전지(初傳地)라는 의미가 그대로 살아있는 마을인 것이다. 무려 15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지명과 함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까지 풍성하다. 지금도 지역 주민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마을을 보존하고 가꾸며 알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모례(毛禮) 선생 집안에서 사용했다는 우물인 ‘모례가정(毛禮家井·경북문화재자료 296호)’ 안내판이 마을 입구 큰 길가에 서있다. 모례가는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집안이며 지역의 유지(有志)로서 당시 얼굴빛이 까무잡잡한 서역 지방에서 온 낯선 전도승(傳道僧)인 묵호자(墨胡子)를 지켜주고 후원한 인물이다. 다행히도 그 시절을 증명하는 집안의 우물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가 주위를 감싸고 있는 마을 중앙에 자리 잡았다. 우물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모례네집 우물’만큼 유명한 우물이 경주의 김유신(金庾信·595~673) 집안의 우물이다. 장군은 위급한 전쟁을 앞두고 무장을 한 채 집 앞을 지나가면서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말 위에 앉은 채로 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전쟁터로 갔다고 한다. 그 집은 아내의 이름을 따라 ‘재매정(財買井)댁’으로 불렀다. 집은 없어졌지만 우물은 그대로 남아있다.
마을집 뿐만 아니라 절집에도 우물은 꼭 필요했다. 혜능(惠能·638~713) 선사께서 중국 광동성 소주(韶州) 땅 조계산에 남화선사(南華禪寺)를 창건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급수의 해결이었다. 많은 대중이 모여 살기 위해선 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물을 만든 방법이 참으로 도인답다. 지팡이[錫杖]로 세 번 땅을 치자[卓] 땅바닥에서 샘물[泉]이 솟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탁석천(卓錫泉)이다. 그 우물 역시 오늘까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사찰의 창건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당송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인 소동파(蘇東坡·1037~1101) 거사가 유배 가는 길에 남화선사를 들렀다. 그리고 탁석천 앞에서 느낀 바가 있어 시를 남겼다. 그가 59세 되던 해인 1096년 작품이다. 그동안 자기 재주를 믿고서 맘껏 휘둘렀던 말과 글 때문에 결국 정치적 박해로 되돌아왔다고 생각한 시인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우물의 용도는 다양하다. 선비에게는 먹물이 묻은 붓을 빨고 또 벼루를 씻는 일도 포함된다. 벼루를 씻는 일은 단순히 벼루를 씻는 일이 아니라 입을 씻는 일이며 또 손을 씻는 일이며 마음을 씻는 일이라 하겠다. 탁석천 앞에서 자기 정화를 위한 의식을 거행한 셈이다. 우물물은 단순한 우물물이 아니라 정화수(井華水)였던 것이다. ‘차사석단천(借師錫端泉) 세아기어연(洗我綺語硯 ).’ ‘선지식께서 지팡이를 꽂아 파놓은 탁석천 물을 가져다가, 비단처럼 꾸민 실속 없는 말을 만들었던 내 벼루를 씻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