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초의 영화는 ‘영웅본색’이었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골목에서 이런저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골목에 살던 아이들은 나를 포함해서 다들 형편이 좋지 않았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 돌멩이, 깡통 따위를 가지고 전쟁놀이를 하다가 슬슬 질리면 소꿉놀이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시큰둥해지면 집에서 온갖 물건을 가져와서 어떻게든 놀이를 만들어냈다. 기다란 수도 호스로 줄넘기를 하기도 하고, 빗자루와 연탄집게로 마법사 흉내를 내며 날아다녔다. 가끔 신문지를 태운 재를 얼굴에 이리저리 발라가며 나름의 연극놀이를 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이런저런’ 창조를 하며 만들어내는 상상의 놀이였다. 그날도 그렇게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따분한 놀이를 펼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극장에 가자고 했다. 다가올 생일선물로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극장’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영화는 당연히 텔레비전에서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로만 보는 것이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버스를 탔다. 한참을 달린 버스에서 내린 후, 다시 한참을 걸어갔다. 저 멀리 거대한 건물 벽에, 선글라스를 낀 채 담뱃불로 달러를 태우고 있는 주윤발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의 크기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극장 안에 들어가니 그림만큼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고, 나는 두 시간 내내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라보았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영화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화면 가득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풍경에 넋을 잃어서, 소풍 나온 아이처럼 그저 눈에 가득 담기만 했다. 영화를 보고 다시 골목으로 돌아왔을 때, 친구들이 나를 둘러쌌다. 나는 골목에서 가장 먼저 극장에 다녀온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마치 선구자 같은 표정으로 영웅본색이 어떤 영화인지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아무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두 시간 내내 넋이 나가 있었기에 장면의 분위기는 기억났지만, 장면의 순서가 깜깜했다.
별 수 없이 먼저 떠오르는 장면 위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내 이야기 속에서 주윤발은 경찰이기도 했고 갱이기도 했다. 장국영은 적룡의 동생이기도 했고 주윤발의 동생이기도 했다. 감옥에 들어간 건 적룡이었는데 출소할 때는 주윤발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렇게 횡설수설하는데도 친구들은 감탄과 환호를 거듭했다. 인생 처음으로 받은 박수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계속해서 이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극장에 포스터가 걸릴 때마다 그 영화를 본 것처럼 연기를 했다. 포스터의 분위기로 내용을 짐작한 후 골목으로 달려와서 이리저리 이야기를 꾸며냈다.
상상의 놀이에 지친 아이들은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감탄과 환호를 거듭했다. 하지만 극장 독점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로 개봉한 영화에 대해서 마구잡이로 이야기를 풀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자신도 그 영화를 봤다며 나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분위기를 보니 그 친구 말고는 영화를 본 아이가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 이야기가 맞다고 우겼다. 그 친구는 첫 장면부터 새롭게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나도 질세라 다시 첫 장면부터 이야기를 풀었다. 갑자기 아이들 눈앞에, 같은 제목을 가진 두 편의 이야기가 동시 개봉되었다. 아이들은 우리 둘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어가며 재미에 따라 장면을 취사선택했다. 환호와 야유도 번갈아 받았다. 어떤 장면은 둘 다 환호를 받았고, 어떤 장면은 둘 다 야유를 받았다.
어느새 어떤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둘 다 누가 더 재밌는 장면을 만들어내는지에 혈안이 되었다. 아마도 그날, 아이들은 누구 이야기가 진실인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구 이야기가 더 재밌는지 투표를 했고, 내가 졌던 것 같다. 더 재밌는 건 그날 이후 극장에 새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영화를 봤다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아이들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풀었다는 것이다. 같은 제목이었지만 아이들마다 주인공과 장르와 주제가 달랐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나면 꼭 투표를 해서 누가 승자인지 가렸다. 모두가 관객인 동시에 창작자였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무엇이건 만들어낼 수 있었던, 우리만의 상상의 극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