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여행을 다녀왔다. 열 살 소년과의 두 번째 여행이었다. 여행지는 경기도 다낭시라고 불린다는 베트남 다낭이었다. 코로나 이후 저가 여행은 막을 내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여행업은 프리미엄과 실속, 투 트랙으로 일대 호황을 이뤘다. 공항엔 연일 만원 버스처럼 빽빽하게 채워진 전세기가 떴고, 밤 비행기에서 내려 밤 비행기를 타고 떠나도록 설계된 트랙에 오른 사람들은 옵션 관광과 쇼핑 센터를 돌며 며칠간 부드럽게 지갑을 털렸다. 단체에 섞인 개인들은 대체로 순응적이었고, 컴플레인에 도가 튼 가이드들은 단호함과 나이스함을 오가며 국경을 넘어 들뜬 이들을 통솔했다.
낯선 문화에 몸을 던져 견문을 넓히는 ‘한 달살이’나 ‘자유 여행’과는 달리 패키지 관광에는 효율을 기준으로 깎아낸 표준의 체험, 평균의 쾌락이 있었다. 선택의 비용을 ‘0′에 가깝게 최적화한 빈틈없는 일정, 느슨한 소속감…. 그 속에 섞여 병아리가 어미 닭을 쫓듯 가이드를 쫓아 45인승 관광 버스에 시간 맞춰 오르내리는 것이, 나는 싫지 않았다.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인지력을 발휘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수동적인 편안함’, 그럼에도 막간을 틈타 장롱 속에 처박힐 게 분명한 싸구려 생활 소품을 사는 소소한 기쁨과 여행비보다 비싼 양털 이불과 영양제 앞에서 홀린 듯 카드를 긁은 후 서로의 어리석음에 안도하는 어리둥절한 순간들.
여행지는 달라져도 도시를 즐기는 루트는 대개 비슷했다. 비치와 대자연, 케이블카와 테마 파크, 성당과 불상, 잡화점과 야시장, 유람선과 야경, 그리고 베이스캠프 같은 한국 식당…. 상투적인 스케줄을 전투적으로 치르며 먹고 웃고 사진 찍다 보면 ‘여행을 해치운 것 같은’ 기계적인 포만감과 동지애가 쌓여간다.
현재의 패키지 꼴을 갖추기까지 여행사 프로모터들은 현지 문화와 관광객 욕망의 퍼즐을 맞춰왔다. 지금 한류는 동남아 곳곳에서 요란한 풍토병을 앓는 듯했다. 온 시내가 쩌렁쩌렁하도록 ‘미스터 트롯’ 음악을 틀어대던 한밤의 유람선, ‘강남 스타일’에 맞춰 땡볕 아래서 신들린 듯 노를 저으며 바구니 배를 돌리던 호이안의 노란 셔츠 입은 사공들을 볼 때면 ‘난 누구 여긴 어디’ 같은 초현실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검게 그을린 순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하는 현지인 앞에서 덩달아 마음이 순해졌다.
전 세계 관광지 곳곳에 뿌리내린 한인 동포들의 상술은 날로 날렵해졌다. 라텍스, 양털, 침향, 커피에 이르기까지 타향살이 감성에 정보와 가족애를 버무린 그들의 스토리텔링 쇼는 40분짜리 잘 짜인 스탠딩 공연 같다. 때론 공연료치고는 너무 비싼 값을 지불한 것 같아 가슴을 치고, 때론 낮은 매상에 어두워진 가이드 안색을 살피며 가슴 졸이는. 그럴 땐 내가 관광을 하는 건지, 해외 로케 스릴러를 찍는 건지 순식간에 장르의 커브를 도는 패키지 관광의 미스터리.
여전히 동포라는 말은 어딘가 애틋한 느낌을 자아낸다. 젓갈에 청국장까지 바리바리 싸왔던 시골 친목계원들, 술에 취해 호텔로 소방차까지 출두시킨 향우회 아저씨들, 무의식중에 뱀고기 쌀국수를 먹고도 “신기하게 화장이 잘 받더라니!” 호방하게 웃어넘기던 동창생 할머니들…. 고국 동포들의 온갖 해프닝을 풀어놓던 가이드가, 곤히 잠든 관광객들 앞에서 마지막 곶감 빼듯 자신의 굴곡진 이민사를 풀어놓을 땐,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차피 길 위에선 모두가 나그네. 패키지 관광의 진짜 풍경은 사람이 아닐는지. 달력보다 지도 보는 인생을 살라고 이어령 선생은 충고했지만, 천성적으로 ‘길치’인 나는 길 위에 서면 사람을 본다. 짧은 시간 동안 여행이라는 전투를 치른 30여 명의 연합군을, 나는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노모를 모시고 온 딸과 언니 부부, 자폐 스펙트럼 아이를 동행한 4인 가족, 중학생 아들과 커플 룩으로 차려입은 젊은 아빠, 노부부, 중년 부부, 은발의 자매들…. 인구통계학으로만 관찰하던 대한민국의 보통 가족, 보통의 행복이 거기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출신도 모른 채 정처없이 나누는 대화, 판단의 목적 없는 순전한 감탄으로 여행의 풍미는 깊어진다. “맥주 맛있죠?” “달러 좀 빌려 드려요?” “동유럽도 좋더라고요.” 그렇게 패키지의 1/n인 우리는 차별 대우도 특별 대우도 없어 평화로운 무리 속에서, 적당히 내어주고 내어받으며 서로의 추억의 원경이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