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석탄조차 외면하고 인력에 의존했던 조선과 차원이 다른 국가다. 사진은 대전광역시 대덕연구개발특구 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 운영 중인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 태양과 같이 핵융합을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장치다. 핵융합발전에는 1억도라는 초고온 플라즈마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술이 관건이다. 연구원에 따르면 이 기술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다.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력발전에 이어 핵융합발전이 상용화되면 대한민국은 또 한번 변신한다. /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3oMbKW5KrBc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 공화국 대한민국은 원자력을 세계에 수출하는가 하면 인공태양, 핵융합에너지 개발로 세계를 주도한다. 석탄도 활용하지 못했던 나라, 오로지 인력(人力)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땔감을 확보하고 생활용품을 이용하며 삶을 영위하던 조선과 다른 나라다.

망가졌던 에너지 독립의 꿈과 인공 태양

“우리가 발전소를 충분히 설치해서 생활 제도나 공업 발전을 하루 바삐 진전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안다. 남북을 통하여 수력과 천연 물자가 상당하므로 우리 국민의 행복과 세계에 자랑할 것을 함께 목적 삼고 주야로 노력 매진함이 우리의 광활한 전도에 첫 걸음이요 부강전진에 호시가 될 것이다.”(1949년 6월 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전남 목포중유발전소 준공식 치사’, 대통령기록관)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치러졌다. 이미 정부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통해 38선 이북을 지배하던 김일성 정권은 나흘 뒤인 5월 14일 대남 송전(送電)을 중단했다. 식민 시대 건설된 수·화력발전소는 80%가 북한에 집중돼 있었다. 송전 중단으로 대한민국은 ‘공장은 맥을 잃고 거리는 실명의 어둠에서 헤매니 문화생활의 진전에 치명상’이었다.(1949년 6월 29일 ‘서울신문’) 이듬해 6월 민간기업인 남선전기주식회사가 원조 자금으로 5000kw급 발전소를 지었다. 1949년 6월 27일 준공된 목포중유발전소는 대한민국이 만든 최초의 발전소였다.

이승만은 그 준공식 치사에서 남북통일에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이틀이 모자란 만 1년 만에 김일성은 6·25를 일으켰고 개전 한 달 만인 7월 24일 목포발전소는 폭격으로 파괴됐다. 대한민국 전역 발전시설도 20%가 파괴됐다. 대한민국 미래를 책임져야 할 에너지원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21년 11월 22일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라는 어려운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 연구소가 ‘1억도 초고온 플라스마 상태를 30초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억도 플라스마’는 태양이 열에너지를 내는 핵융합 방식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환경이다. 그 환경을 인위적으로 30초라는 ‘초장기간’ 유지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한 것이다. 바닷물을 연료로 쓰는 핵융합 에너지는 꿈의 에너지라고도 한다. ‘인공 태양’이라고도 불리는 이 핵융합 에너지 발전은 핵분열 에너지를 이용하는 원자력발전보다 더 저렴한 전력 이용이 가능해진다.

에너지 독립의 전사(前史), 조선

‘청나라는 철을 석탄을 사용해 제련한다. 석탄은 화력이 세서 단단한 쇠도 제련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병기(兵器)와 농기구는 우리보다 곱절이나 견고하고 예리하다. 중국에서 사들여 온 철제품이 손상되기라도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단련하지 못한다.’(박제가, ‘철(鐵)’, 북학의 내편(1778), 안대회 역, 돌베개, 2013, p143)

석탄을 동력원으로 산업혁명이 유럽에서 한창일 때, 조선 지식인 박제가는 조선에는 없고 청나라에는 있는 동력원 석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때가 1778년이다. 박제가는 정조에게 올리는 ‘북학의’를 따로 만들어 이렇게 덧붙였다. ‘단천과 양근에서 석탄이 난다고 하니, 석탄을 도입해 농기구나 수레바퀴를 제조할 때 사용해야 한다.’(박제가, ‘철’, ‘진상본 북학의’)

그런데 이를 조선 정부가 수용해 정책화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7년 뒤인 1795년 정조 총애를 받은 또 다른 학자 이가환(李家煥·1742~1801)은 자기 문집 ‘정헌쇄록(貞軒鎖錄)’에 이렇게 기록했다. ‘연경(북경) 시장에서 들여온 칼과 가위는 한번 부서지면 다시 벼릴 수 없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모르는데, 이는 석탄으로 벼려 제련한 것이라서 그렇다. 석탄으로 제련한 쇠는 숯으로는 다시 제련할 수 없다.’(이가환, ‘정헌쇄록’, 안대회, 앞 책, 재인용) 87년이 지난 1882년 양진화라는 선비가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다. “석탄이라는 것은 싸고 용도가 넓다. 중국, 서양에서는 석탄으로 물건을 만든다.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은 석탄이다. 평양에서 석탄이 나니 하늘과 땅이 준 복이다. 이름은 탄(炭)이지만 이용 가치는 금은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1882년 음력 11월 19일 ‘고종실록’)

1907년 3월 조선을 방문했던 주일독일대사관 무관 헤르만 산더 일행이 촬영한 사진. 사진에는 ‘세 사람이 집을 짓는데 지키는 사람이 두 명이다’라고 적혀 있다. 조선 지하에는 화석연료인 석탄이 대량 매장돼 있었지만 일상에 투입된 동력원은 인력(人力)이었다. 생산성은 극도로 열악했다./국립민속박물관

1907년 3월 주일 독일 영사관 무관 헤르만 산더는 대한제국을 여행하며 많은 사진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한 장에는 집을 짓는 사람 다섯 명이 촬영돼 있다. 산더는 이렇게 기록했다. ‘세 사람이 집을 짓는데 지키는 사람이 두 명이다.’(‘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여행’ 국립민속박물관, 2006, p205) 조선에는 인력을 능가하는 동력원이 없었다. 따라서 생산성은 극도로 낮았고 가난했다.

“태평양에 빠져 죽더라도!”

전쟁이 끝났다. 통일을 희구했던 꿈은 일장춘몽이 됐다. 만신창이가 된 신생 공화국 대한민국은 파괴된 발전소 재건과 함께 원자력에 미래를 걸었다. 1955년 7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과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 간 협력을 위한 협정’에 가조인했다. 협정은 이듬해 2월 3일 정식 체결됐다. 그리고 3월 9일 대통령령으로 문교부에 원자력과가 신설됐다.

1958년 2월 22일 원자력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4일 대통령 이승만은 연구로 1호기 구입을 승인했다. 이미 일본과 중국은 몇 달 새에 연구용 원자로를 완공하고 점화한 상태였다. 1959년 2월 3일 대한민국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됐다. 장소는 서울 공릉동 서울공대 캠퍼스였다.

1959년 7월 14일 미국산 연구용원자로 1호기 기공식.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직접 삽을 들었다. 1955년 12월 대한민국은 미국과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원자력시대를 준비했다./한국원자력연구원 제공

그리고 1959년 그해 7월 5일 미국에서 구입해온 연구용 원자로 기자재가 인천에 도착했다. 진행 속도는 빨랐다. 자재 도착 9일 뒤인 7월 14일 연구로 1호기 기공식이 열렸다. 기공식에는 대통령 이승만이 직접 참석해 삽을 들었다. 1호기는 1962년 3월 19일 오전 10시 50분 핵연료를 장전해 3월 23일 정상 가동이 확인됐다.

1978년 첫 상업발전소인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준공됐다. 그런데 이보다 2년 전인 1976년 3월 원자력연구소는 2000년까지 대한민국 전력 50%를 원자력이 담당하고 이를 국산화한다는 계획을 정부에 제출했다. 핵심 목표 가운데 원자로 설계기술과 연료 국산화가 포함돼 있었다.(이상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 2019)

1986년 12월 4일이었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세계 원전이 움츠러들었던 겨울날이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기술 국산화를 위한 출정식이 있었다. 원자로 계통설계 연구원 44명이 미국 동부 코네티컷에 있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설계센터’로 유학을 떠나는 날이었다. 당시 연구소장 한필순이 특별히 마련한 이 출정식에서 연구원들은 이렇게 세 번 외쳤다. “필(必) 설계기술 자립!” 이는 소장 한필순이 가진 평소 지론이었다. ‘에너지 자립 없이는 진정한 독립이 없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전 원자력연구소장 한필순(1933~2015) 묘. 한필순이 원자력연구소장이던 시절 대한민국은 한국형 원자로를 개발했고 중·경수로용 핵연료 국산화에 성공했다. 묘비 기단에는 평소 지론이 새겨져 있다. ‘에너지 자립 없는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은 없다.’ /박종인 기자

기계부장이던 김병구는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는 설계기술 자립에 성공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였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장기간 기술정지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한국은 원자력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총 200명이 넘는 연구원들 가운데 낙오되거나 이탈한 사람은 없었다.’(김병구, 2019년 4월 4일 ‘대덕넷’ 기고문) 결국 설계는 물론 핵연료 제조 국산화는 물론 원자로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원자력에서 핵융합으로

그사이 대한민국은 핵분열에너지에서 한발짝 나가 태양에너지와 원리가 같은 핵융합에너지에 도전했다. 핵융합은 바닷물에 풍부한 중수소와 리튬을 이용한 에너지다.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결합할 때 헬륨이 생산되고 에너지가 나온다. 이는 1억도라는 초고온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핵융합에너지 연구를 위해 설립된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대덕연구소에는 핵융합을 위한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가 있다. 1995년 개발을 시작해 2007년에 완공된 장치다. 초전도자석을 이용해 1억도를 유지하는 장치다.

1995년 개발이 시작된 이래 2011년 이후 세운 기록은 모두 ‘세계 최초’며 ‘세계 최고’다. 2018년에는 1.5초, 2020년에는 20초 동안 안정적으로 1억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2021년에는 ‘자그마치’ 30초 유지에 성공했다. 올해 7월은 50초가 목표고 2026년에는 300초가 목표다. 연구원에 따르면 ‘300초가 지나면 안정되고 지속적인 핵융합이 가능해지고’ 이는 ‘24시간 정상 가동 기술이 확보됐음’을 뜻한다.

KSTAR가 있는 구역 벽면에는 70여 개 참여기업 로고가 붙어 있다. 연구원장 유석재는 “저 이름들을 볼 때마다 울컥한다”고 했다. 울컥할 만하지 않은가. 이게 성공하면 국토 3면을 포위한 바닷물이 순식간에 미래 에너지원이 된다. 바닷물 45리터가 가지고 있는 열량이 석탄 40톤이 내는 에너지로 변하는 것이다.(‘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자료’, 2023년 5월 12일, p13) 석탄도 모르고 살다가 식민시대를 겪고 전쟁을 겪은 신생 공화국 과학자들이 만들고 있는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