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핵무기를 실전에 사용할 권리가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러시아의 협박이다. 최근 러시아의 핵 위협은 갈수록 강력해지고 논리도 세밀해졌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독재자 푸틴은 핵 버튼을 만지작거린다. 우크라이나의 정당하고 영웅적인 항전 이면에 놓인 우크라이나 전쟁의 역설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면 파국’이라는 미국의 거듭된 경고가 상황의 엄중함을 증명한다. 미국과 소련이 핵 대결 직전까지 간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대 핵전쟁 위기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9월 20일 러시아 오렌부르크에서 열린 군사훈련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다. 푸틴은 최근 러시아가 흡수하려는 점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우크라이나의 시도를 막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AP연합뉴스

푸틴이 미친 게 아니라면 핵은 사용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전문가들 예측과는 정반대로 러시아는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립된 ‘핵무기는 사용 불가능하다’는 보편 규범이 미국의 쇠퇴와 함께 무너지고 있다. 유엔(국제연합)과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의 유효성이 의심받는 거대한 퇴행의 시대다. 핵 강국 간 전쟁을 억제한 상호 확증 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원칙도 흔들린다. 핵 전면전을 막아온 지구적 리더십이 실종 상태다.

정전 70년 장기 평화에 중독된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을 지켜온 유엔과 NPT 체제 쇠락을 보면서도 집안싸움에 바쁘다. 한반도에 갇힌 한국인의 자의식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남의 일로 여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발 에너지·원자재·식량 위기가 전 지구적 공황을 야기하면서 직격탄을 맞은 곳은 한국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핵전쟁으로 비화하면 한반도는 아마겟돈 전쟁 한가운데로 휩쓸리게 된다.

‘핵무기 사용 권리’를 강변하는 러시아 수뇌부 공언이 경악스러운 건 이 때문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영토의 15%나 되는 동남부 점령지 4주(州)를 러시아 영토로 합병하는 법적 절차를 오늘 마무리할 예정이다. 실지(失地) 회복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반격은 이제 ‘러시아 본토에 대한 무력 공격’이 된다. 러시아 핵전쟁 교리는 ‘우리 영토와 주권이 침해될 때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러시아가 ‘특수 군사작전’이라는 제한전을 핵전쟁으로 키우면 미국도 핵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핵 강국들과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엔 핵 버튼을 통제할 겹겹의 제도적 장치가 있지만 러시아와 북한은 다르다. 권력을 잃거나 핵 버튼을 눌러야 하는 처지에 몰린 푸틴을 막을 제어 장치가 러시아엔 없다. 핵 보유를 국체(國體)로 삼은 북한은 더 끔찍하다. 북한은 지난 9월 9일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핵 공격을 법제화했다. 다섯 가지 선제 핵 공격 조건에 ‘유사시 전쟁 주도권 장악 등 작전상 필요’까지 넣었다. 핵 선제공격 ‘권리’를 무한대로 확장한 조폭 국가가 대한민국을 겨냥해도 우리는 강 건너 불 보듯 태평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핵탄으로 8만여 명이 즉사했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 핵탄으로 3만여 명이 죽었다. 생지옥이 된 두 도시에선 후유증으로 사상자가 수십만 명 더 나왔다. 결사 항전을 외친 ‘대일본제국’을 ‘무조건 항복’하게 만든 압도적 위력이었다. 오늘날 소규모 전술핵무기도 히로시마·나가사키를 초토화한 핵탄 위력의 수배~수십 배이고 전략 핵무기는 수백~수천 배 파괴력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핵 공격 위협은 북한의 한국 핵 공격 협박과 직결된다. 푸틴의 핵 공갈이 먹힐 때 가장 기뻐할 자(者)는 우리를 노리는 김정은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핵전쟁 불감증이 치명적인 이유다. 미국의 확장 억제 전략이 북핵을 막는다지만 국제 정치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

핵전쟁 위기 국난(國難)에도 우린 ‘대통령 비속어 파문’ 내전(內戰) 중이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다.’(김훈 『남한산성』) 외적(外敵)에게 포위된 결정적 순간에 말꼬리 잡아 정적(政敵)을 죽이려는 당쟁 정치가 한국 사회를 질식시킨다. 말도 중요하지만 살아남는 일은 훨씬 절박하다. 북한은 9월 28일 핵무기 탑재 가능한 탄도미사일을 동해상으로 쏘아 올렸다. 올해 북의 탄도미사일 발사만 18차례지만 한국군만으로는 북핵 미사일을 방어할 수단이 없다. ‘한국형 아이언돔’ 방공망 건설은 국가 존망과 국민 생사 문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박한 과제는 나토형 핵 공유나 자체 핵무장이다. 21세기 핵전쟁은 결코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