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인수위가 지난 한 달여 동안 했던 일을 생각해본다. 청와대 집무실의 용산 이전 문제가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킬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 이슈 하나로 절반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 계산법을 만 나이로 통일한 것, 다주택자 양도세를 1년 감면키로 한 것도 떠오른다. 그 밖에도 각 분야에서 많은 과제들을 내놓긴 한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만큼 작고 자잘한 각론에 매달렸다는 뜻이다. 5년 간 나라를 어떻게 이끌고 가겠다는 큰 그림의 청사진은 보여주지 못했다.
역대 정권은 저마다의 통치 플랜을 갖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청산이라는 무혈 혁명을 단행했고,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과 디지털 경제화로 족적을 남겼다. 논란은 있지만 박근혜·문재인 정부에도 창조 경제, 적폐 청산이란 정권 차원 어젠다가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주제’는 무언가. 어떤 비전으로 국정을 차별화하고 어떤 전략으로 정권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것인가. 이 질문에 윤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는 아직껏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윤 당선인이 가장 힘주어 말한 것은 ‘공정과 상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국정 비전이 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인권·법치가 특정 정권의 전유물일 수 없듯, 공정·상식 또한 물과 공기처럼 지극히 당연한 국가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난 몇 년간 주목받았던 것은 문재인 정부의 불공정·비상식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뿐이다. 문 정권이 끝나는 순간 공정·상식의 프레임도 제자리로 돌아가야 맞는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윤 당선인 자신이 불공정 논란에 휩싸여 있다. 정호영 복지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은 ‘조국 사태’의 복사판과도 같다. 자기가 간부로 있는 병원에서 자녀들이 인턴을 하고, 논문 저자로 등재하는가 하면, 동료 교수들이 높은 면접 점수를 준 덕에 두 자녀가 의대 편입에 성공했다. 검증팀이 이런 의혹을 못 걸러낸 것도 실망이지만 “확실한 팩트가 없다”는 이유로 싸고 도는 윤 당선인이 스스로 ‘윤석열다움’에 먹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장 큰 정치 자산에 흠집이 생겼다.
한 정권의 ‘주제’란 그 정권이 명운을 걸고 추구하는 국정 지향점을 말한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면 윤석열 정부의 지향점은 ‘전임 정권 지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 재정, 부동산, 대북·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문 정권의 기조를 뒤집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임자가 워낙 국정을 망쳐 놓은 탓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 정부 정책만 아니면 된다’는 이른바 ‘ABM(Anything But Moon)’이 새 정부의 국정 어젠다일 수는 없다. 전임자 부정(否定)을 넘어, 건설적이고 미래 지향적 비전을 제시해야 된다는 뜻이다.
윤 당선인은 문 정권의 ‘인사 사유화’와 결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첫 내각의 면면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오랜 지기를 복지부 장관에, 고교 후배를 행안부 장관에, 최고 심복을 법무부 장관에 기용했다. 절친하다는 대학 동기를 감사위원에 보내기도 했다. 윤 당선인은 할당·안배 없이 실력만 따졌다고 하지만 장관 후보들이 과연 그 분야 최고 전문가인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윤 당선인은 잘 아는 사람만 쓰는 타입이라고 한다. 인재 풀을 좁게 가져가는 것은 치명적 패착이 될 수 있다. 문 정권의 실패도 내 편만 쓴다는 진영 인사 탓이 컸다.
윤 당선인은 전임자의 재정 포퓰리즘을 매섭게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윤 정부 역시 현금 퍼주는 공약을 강행하겠다고 한다. 자녀 낳은 부모에게 1200만원씩 주고, 고령자 기초연금을 월 10만원, 병장 월급은 200만원까지 올리겠다고 한다. 이 세 가지 현금 복지만으로도 연 17조원이 필요하다. 그토록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던 윤 당선인이 맞나 싶다.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윤 당선인은 ‘불통(不通)의 통치’를 끝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몇몇 현안에서 보여준 그의 고집은 소통이나 통합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불렀다. 충분한 논의 없이 집무실 용산 이전을 밀어붙인 것, 여당 반발이 뻔한 한동훈을 법무장관에 지명한 것, 복지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들에 침묵하는 것 등이 그 예다. 마이 웨이를 고수하는 윤 당선인을 보며 전임자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권 출범을 3주 앞둔 지금쯤이면 5년 국정의 마스터 플랜과 분야별 계획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 골든 타임을 허비한 채 철학 빈곤과 준비 부족 상태로 윤 정부 5년의 막이 오르게 됐다. 안타깝게도 출발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